## 철없는 학생들과 위선적 지식인 ##
1965년 4월30일 오후 방한중인 마샬 그린 미 국무부 극동담당 부차관보는
정동 미대사관저에 윤보선 민정당 총재를 초대하여 한일회담과 관련한 요담을
했다. 그린 부차관보는 5·16군사 혁명 때는 대리대사로서 윤대통령을 찾아가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쿠데타군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동원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한 인연이 있었다. 이날 민정당의 김준연의원은 그린 부차관보를
'각하'라고 호칭하면서 그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했는데 요지는 박대통령의
방미 정상회담 계획을 중단시켜달라는 것이었다. 한 공화당 의원은 이렇게
불평했다.
"자기 나라 현직 대통령도 안만나겠다는 전직 대통령은 외국의 외교관을
찾아가 만나고 또 다른 인사는 각하란 말까지 썼는데 이건 굴욕외교가 아닌가."
한 야당의원도 "부차관보는 우리나라 국장급인데…"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보도되었다. 이날 박대통령도 벌컥했다. 그는 박상길 대변인을
불러들였다.
"그 X버선인지 헌버선(편집자주-윤보선을 지칭)인지 하는 자가 하는 말을
나는 다 알고 있지. 새카만 일본 헤이타이(병대) 출신인 째그마한 내가 …
제까짓 게 뭘 알겠느냐, 이런 말 아니오? 도대체 당신은 뭘하는 사람이오?"
박상길은 나오자마자 윤보선의 '사대적 태도'를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
다음날 그린 부차관보가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와 함께 청와대를 찾아왔다.
박대통령은 그린이 윤 전 대통령을 만난 데 대하여 기분이 상해 있었다. 그린
부차관보는 일국의 대통령을 앞에 두고도 담배를 꼬나물고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박대통령은 그 무서운 눈매를 번득이면서 그린을 정면으로 쏘아보더니
통역에게 말했다.
"이 자에게 내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빼지 말고 그대로 통역하시오."
박정희는 비수 같은 질문들을 던졌다.
"그래 윤보선씨가 뭐라고 하던가?"
"당신은 지금도 내가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는가?"
배석했던 박상길에 따르면 그린은 원색적인 대통령의 한국말을 얼마간
알아듣는 것 같았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시선을 그린의 눈에 고정시키고
추궁하듯이 따지고 들었다.
이즈음 박대통령은 학생-지식인-야당세력들이 다시 뭉쳐서 조인이 임박한
한일국교정상화조약 반대운동을 벌이려고 하는 조짐에 대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린 부차관보를 혼내준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은 진해 제4비료
공장 기공식에 참석, 치사를 하다가 미리 준비한 원고를 제쳐놓고 학생들과
인테리들을 향해서 격한 비판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끔 책상을 소리나게 치면서 자신의 분노를 격앙된
억양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오늘 이 자리에 학생들도 좀 얼굴이 보이기 때문에 내 좀 더 얘기를 하려
합니다. 학생들! 지금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뭐라고 떠들면 내용도 모르고
덮어놓고 거리에 나와서 플래카드를 들고 무슨 학교에서 성토대회도 하고
'무슨 정부 물러가라, 매국하는 정부 물러가라' 하는 등 이런 철없는 짓도
하는데, 나는 학생 제군들에게 솔직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두거니와 제군들이
앞으로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자면, 적어도 10년 내지 20년 후에라야만 제군들이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제군들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 이때에는 우리들 기성세대가 모든것을 책임지고 여러분들 못지 않게
나라에 대한 것을 걱정하고 근심을 하고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4·19 정신의 계승운운 하나 그런 정신은 백년에 한번이나
수백년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숭고한 정신입니다. 문제 하나하나를 4·19정신에
결부시킨다면 4·19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철부지 학생들'에 이어 위선적인 지식인들에게 예봉을 들이댔다.
"과거 일제 시대에 우리가 일제와 싸우던 것과 마찬가지인 정신자세, 즉
왜적이 와서 우리를 점령하고 우리를 식민지화하고 우리가 남의 노예가 되었을
때 우리가 일제에 대항하던 이러한 정신자세는 (지금에 와서는)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인텔리 가운데는 정부가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하여야만 그 사람이 아주 인텔리이고 지식인이고 애국자연합니다. 정부가
하는 일은 그네가 아무리 생각해도 옳다고 해도 여럿이 있는 데서
이야기했다가는 '저 사람은 사쿠라요 정부의 앞잡이다'하는, 이런 우리 한국의
인텔리들의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지기 전에는 한국의 근대화라는
것은 어렵습니다."
박대통령에게 호된 꾸중을 듣게되는 그린 부차관보가 부인과 함께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
(* 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