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에 태어나 지속되는 전란 속에서 제대로 먹고 입고 살지 못한
세대에게 통행금지와 교복은 야간 생활이나 인신자유의 구속 수단이기
이전에 더러는 한숨도 서리고 쓴 웃음도 자아내는 필요악이요 향수다.
통행금지가 없었다면 빈곤 속에 횡행하는 범죄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고,
교복이 없었다면 사춘기의 옷에 대한 컴플렉스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속은 풀릴수록, 인신은 자유로울수록 좋은 것이다.
군사정권이 억압심리를 풀어주는 수단이었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으나
이를 계기로 새로운 개방문화가 개막한 것이다.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

"밤을 걷어내는 먼동이 텄다. 통금이여 안녕. 마지막 통금을 넘긴 5일

새벽 4시는 유보됐던 권리가 회복되고 '24'시가 비로소 시작되는, 기억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것은 37년 세월동안 일상속에서 길들여졌던 밤의 통제와

제한이 마지막을 고하는 순간이었고, 또 다른 자제와 절제의 시민의식이

요구되는 시작이기도 했다.서울 한복판의 동맥, 서대문 로터리를 가로막았던 육

중한 이 바리케이트도 앞으로는 볼수 없게 되겠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마지막인 것보다 값진 것의 출발점이라는 점--."

1982년 1월5일자 조선일보 1면에 바리케이트를 걷어내는 사진에 붙은
설명이다. 이 기사는 한 편의 시처럼, 1945년 9월 미국사령관 하지의
군정포고 1호로 이 땅에 시작된 통행금지가 해제된 기쁨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통금 마지막날 표정은 어떠했을까? "얼큰히 술이 오른 취객, 가게문을 막
닫은 상인들. 역과 터미널에서 막차를 내린 여객들. 그리고 마지막 손님을
태운 택시들. 모두가 바빴다. 그러나 평상시 자정에 임박한 때와는 뭔가
달랐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공연히 유쾌한 걸음걸이들. '통금해제가
오늘밤부터인줄 알았는데요--' 멋적게 머리를 긁적이는 통금위반자. '오늘이
마지막 통금이죠'라는 경찰관의 친절한 말씨. 이제 내일부터 저 거리가 24시간
살아서 숨쉬겠지." 사회면은 30대이상 세대라면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사이렌 소리, '야통'이 사라지는 풍경을 절제된 문장으로 그리고 있다.

이 조처는 81년 국회에서 민정, 민한, 국민 3당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국무회의를 거쳐 이날 전격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정부는 이와함께 중고교생의
머리모양도 자율화시키는 한편, 교복도 1년 준비기간을 거쳐 자유복장으로
바꾸기로 했다.

야통 해제 및 중고교생 두발 자유화는 국민들의 오랜 염원이었지만 일각에서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5공화국의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괄호속에 4시간을 넣어놓고 하루를 살아야했던 국민들이나,
죄수처럼 머리를 깎은채 군복같은 검정색 교복속에 몸을 가둬 놓아야했던
사춘기 중고생들에게 준 반향은 대단했다.

오랫동안 눌려왔던 탓인지 반작용도 강했다. 두발 자유화가 시작된지 석달도
안돼 중고생들 사이에 장발이 늘어났다. 남학생은 뒷머리만 길게 기른
'제비꼬리형'머리, 여학생은 '디스코 퍼머'가 유행했다. 망사 스타킹에 굽높은
샌들, 무릎까지 올라오는 디스코 바지, 당시로서는 비싼 2만~3만원짜리 외제
운동화로 멋내기 경쟁이 벌어졌다.

1920년대부터 존속된 군국주의 잔재가 사라지면서 빚어낸 일시적 현상이었다.
분명했던 것은 통금해제와 교복-두발 자유화는 획일적 사회에서 다양화 사회로,
규제된 사고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으로의 대전환이었다. 이런 혁명적 변화는
컬러 텔레비젼 보급과 함께 한국의 80년대를 비로소 대중시대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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