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독 방문길 ##
1964년 12월6일 일요일 낮 12시 30분쯤, 청와대 본관에서 박대통령
부부를 태우고 나온 승용차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멎었다. 예
총회관 낙성식이 준비돼 있었다. 박대통령은 준공 테이프를 끊고 참석
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다시 차에 올랐다. 차가 세종로로 나오면
서 차량 행렬은 달라졌다. 기동경찰대의 모터 사이클이 여덟 팔자 대
형으로 선도하고 대통령 부부가 탄 차량의 좌우로는 경찰의 지붕없는
지프차가 호위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차량 뒤로는 검은 색 세단들이
꼬리를 물었다. 시청앞-덕수궁 모퉁이를 돌아 김포공항에 이르는 주요
도로는 태극기와 독일의 삼색기로 단장되고 공무원과 학생들이 시민들
과 어우러져 태극기를 흔들며 박대통령 일행을 배웅했다.
출발 30분 전인 오후 1시10분, 김포공항에 도착한 박대통령은 군악
대의 주악이 울려퍼지며 21발의 예포가 터지는 가운데 정일권 국무총
리의 안내로 삼군의장대를 사열했다. 박대통령은 각 방송사의 마이크
들이 숲을 이루고 서 있는 환송대로 올라갔다. 단상 좌우에는 옥색 치
마와 두루마기 위로 은색 밍크 목도리를 두른 육영수와 정일권 국무총
리가 섰다. 박대통령의 뒤로는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보잉 707기
가 대기중이었다. 이 비행기는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본-도쿄 상용노선
에 취항중인 여객기였다. 서독 정부가 1등석과 2등석 절반을 비우게
하고 중간에 커튼을 친 다음 한국의 대통령 탑승기로 제공한 것이었다.
2등석 후미에는 동경에서 탑승한 승객들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창밖
에서 진행중인 행사를 지켜보았다. 박정희는 카랑카랑한 육성으로 인
삿말을 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오늘 우리와 가장 친밀한 우방의 하
나인 독일 연방공화국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독일 방문의 여정
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박정희는 다음 대목에서는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종전후의 그 폐허 위에서, 더구나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면
서, 오늘의 위대한 경제 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독일연방공화국의 부흥
상을 샅샅이 시찰할 것이며, 아울러 경제적 자립을 위해 분발하는 패
기에 찬 한국민의 결의도 소개함과 동시에 양국 공통의 관심사에 관해
상호 이해를 증진시켜 …."
인사말을 마친 박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조
진만 대법원장, 주한외교사절단을 대표한 로제 상바르 프랑스 대사의
인사를 받고 환송식을 마쳤다.
박대통령 부부는 공항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던 약 1천여명의 환송
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비행기로 이어진 1백여m 길이의 붉은 양탄자길
을 걸었다. 수행원 24명이 대통령의 뒤를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공식
수행원으로는 영부인 육영수를 비롯, 장기영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
관, 이동원 외무부장관, 박충훈 상공부 장관, 김동환 국회 외무위원장,
김성진 공화당의원, 조윤형 민정당 의원,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최
덕신 주독 대사, 김종오 합참의장,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정도순
외무부 의전실장, 조상호 청와대 의전 비서관 등 13명이었다.
비공식 수행원으로는 백영훈 중앙대학교 교수(대통령 통역), 노석
찬 공보부 차관, 박상길 청와대 대변인, 지홍창 대통령 주치의, 신동
관 청와대 경호과장, 이복형·이천배 청와대 경호실 경호관, 나은실·
황경분 영부인 비서, 이정섭·박진석 공보부 사진기사 등 11명. 수행
기자단 10명도 2등석에 올랐다.
박대통령 일행을 태운 루프트한자기는 오후 1시40분에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상용노선에 취항중이던 관계로 함께 탑승한 민간인 승객들
의 중간 기착지를 모두 경유했다. 박정희는 홍콩-방콕(태국)-뉴델리
(인도)-카라치(파키스탄)-카이로(이집트)-로마(이탈리아)- 프랑크푸르
트를 거쳐 본 공항에 도착하는, 28시간이나 걸리는 긴 여행을 시작했
다. 박정희는 외국을 방문하는 국가원수로서 외국 여객기에 일반승객
과 합승해야 하는 처지에 대해 느끼는 비애가 남달랐을 것이다. 오후
1시40분. 김포공항을 이륙한 대통령 탑승기는 항로를 일본 쿠슈 남단
방향으로 잡고 비행했다. 한국 공군의 F-86 세이버기 1개 편대가 제주
도 남단까지 호위했다. 이때 박대통령은 서비스로 제공되던 샴페인을
들었다. 자신 때문에 동경에서 홍콩으로 직항하지 못한 채 서울까지
들러야 했던 2등석 가림막 뒤의 일반 승객에게도 샴페인 한 잔씩을 돌
렸다.
쿠슈 남단 상공에 도착한 특별기는 정기항공노선에 올라 1차 경유
지인 홍콩으로 향했다. 일본 상공에서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박대통령
은 육영수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주로 창 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
각에 잠기곤 했다.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에서 수행기자단에 참가했던
이자헌(전 민자당 원내총무·현 한나라당 평택을 지구당 위원장)기자
의 회고-.
"이등석에 앉았던 우리들은 가림막 뒤의 일반 승객들이 사용하던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화장실에 가 보니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거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한 번씩 화장실을 다녀온 기자들이 모여
이것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 것인지 논의를 했습니다. 그때 여기자로
유일하게 수행기자단에 포함됐던 한국일보의 정광모 기자가 물비누라
고 설명해 줘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지요. 그때는 기자들도 국제적 촌
놈들이었고 대통령 일행도 참 초라한 행차를 하고 있었습니다. 박대통
령의 표정이 밝지 못했습니다."
(*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
(* 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