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론과 상고사 열기의 부침은 유장한 역사를 갖고 있다. 민족이 위기에 봉착하거나 사상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면 어김없이 단군론이 등장, 돌파구 마련의 가능성으로 제시되곤 했다.

학계에서는 단군(단군)이 우리 역사에서 민족 시조로 처음 등장한 것이 고려시대였다고 본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당시까지도 존재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 후예들의 대립의식을 누그러뜨리고 공동체 의식을 높이기 위한

정신적인 구심점이 필요했다. 고구려의 계승을 자처했던 고려는 이를 위해 고구려 조상신 가운데 하나였던

단군을 민족시조로 받들었다.

단군이 본격적으로 민족의 신앙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고려말 몽골간섭기에 이르러서였다. 오랜 몽골의 영향
밑에서 민족적 자존심이 손상되자 고려의 지식인들은 단군을 통해 우리 문화의 원류를 탐구함으로써 이를
만회하려고 했다. 일연(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이승휴)의 [제왕운기]가 그 대표적 저술이며 오늘날
우리의 단군 인식은 대부분 여기에 바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구월산 삼성사, 마니산 참성단 등 단군 유적에 국가가 제사를 올리는 등 단군은 여전히
민족의 시조로 받들어졌다. 그러나 유교적 합리주의를 앞세운 조선왕조는 단군 전승 가운데 사실적 요소가
적다고 판단한 환인, 환웅, 웅녀에 관한 부분 등을 삭제했다.

우리 역사상 단군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아졌던 것은 한말 국권상실 위기 속에서였다. 당시 애국지사들은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서 단군에 주목했고 이를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1909년 중광(중광)된
대종교(대종교)는 단군 신앙을 근대종교로 발전시켰으며 1910년대 독립운동은 대부분 그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다.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의 이념이 다양화함에 따라 대종교의 위상은 약화됐지만 이후에도
만주지역에서 상당한 세력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해방으로 한동안 약화됐던 단군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들어 다시 한차례 부각됐다. 안호상(안호상)
문정창(문정창) 박시인(박시인)씨를 비롯한 재야(재야)사학자들은 고대사 연구와 교육이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소송도 불사하는 강력한 공세를 펼쳤다.

90년대 들어 소강상태를 보이던 단군 논의는 최근 한문화운동연합이 전국 학교에 단군상 보급 운동을 벌이고
[상고사 바로잡기]를 내세우는 민족정신회복시민운동연합이 결성됨으로써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 이번 단군
논의는 주도세력과 이념에서 80년대의 단군 논의와 차이점을 보여준다.

주도세력으로는 시인 김지하씨를
필두로 박성수(박성수) 전정문연교수, 우실하 연세대강사 등이 주요 논진을 구성하고 있고 단학선원이 이를
지원하고 있다. 지금이 단학(단학) 선(선) 기(기) 등 정신적 가치와 그것의 수련에 관한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고양돼 있는 시점이란 점도 과거의 단군론에 비해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단군론의 내용에 대해서도
김지하씨는 {지금 필요한 것은 안호상식의 국가주의적 단군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자신은 단군의 역사적
실체를 복원하고 그 사상을 재해석함으로써 민족통일과 세계의 미래에 기여할 보편적인 새로운 철학적 담론을
만들어내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씨가 학계의 상고사 연구와 교육이 일제 식민사관의 왜곡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며 소위
[강단사학]을 강하게 매도하고 나선 것은 과거의 단군론과 큰 차이가 없는 부분이다. 김씨의 단군론이
[규원사화(규원사화)] [단기고사(단기고사)] [환단고기(환단고기)] 등 대종교 계통의 역사서에 근거를 두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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