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꽃회' 사건 ##
1964년 6월5일, 6·3사태로 인한 비상계엄령 선포 직후 계엄당국
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재학중이던 김정강(당시 26세·뒤에 통일
민주당 총재 특보역임)을 학생데모 배후조종자로 지목, 현상금 10만
원을 걸고 수배령을 내렸다.
김정강은 1959년에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해 그 해에 이
념서클 '신진회'에 가입한 뒤 마르크스-레닌의 이론에 빠져들면서
신진회 선배들이 4·19 학생데모를 지도하는 것을 보고 배웠다.
김정강은 남북한간의 정통성 문제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친북주
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장면정부 시절 국회의사당 점거 농성
등 각종 시위를 배후조종하다 5·16 쿠데타 직후 계엄당국으로부터
수배를 받자 허술한 행정의 틈을 타 군에 입대했다. 그가 군방첩대
에 체포된 것은 1963년 2월. 평소 증거를 남기지 않는 등 신변정리
를 잘 한 덕분에 곧 풀려났다.
학교로 돌아 온 김정강은 '신진회'의 정체가 노출됐으므로 활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합법적으로 학생운동을 이끌어 갈 단체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제5대 대통령 선거가 막 시작될 무렵이던 1963
년 9월경 김정강은 정치학과 후배들과 함께 '민비연(민족주의 비교
연구회)'을 조직했다.
김정강은 지하조직을 전국적으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에서는 문리대뿐 아니라 상과대, 사범대, 공과대 등 각 단대별로 조
직인원이 확보되었고 1964년 초에는 서울시내 주요대학은 물론 대구,
부산, 광주 지역의 각 대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수준까지 진행되었다.
전국 조직의 명칭은 '반제(반제)전국학생동맹'이었고 서울대학교 문
리대에서 조직된 서클 명칭은 '불꽃회'였다.
'미제의 번견 박정희는…'으로 시작되는 불꽃회 강령은 '조국의
북반부에서는 김일성 동지를 수령으로 하는 위대한 조선공산당의 지
휘하에 사회주의 조국건설에 성공하고 …'란 대목이 있었다.
'불꽃회'는 박정희를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군사 파시스트'라
고 규정하고 박정희 정권을 '식민지 예속 파쇼정권'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김일성에 대해서는 '위대한 조선노동당의 혁명의 지도역량'이
라고 정의내리고 있었다. 김정강의 '불꽃회'는 한국 최초의 대학내
자생 친북조직이었다.
1964년 3월 조직구성을 완료한 김정남은 3·24 한일회담 반대데
모와 6·3데모를 조종하다가 비상계엄령이 내려지자 도피했다. 수배
전단은 그의 고향인 경남 진주의 골목에도 붙었다. 제재소를 운영하
던 부친의 직원 집 다락에 숨어있던 김정강은 6월7일 박문병 경감이
지휘하는 40여명의 형사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체포됐다.
체포된 김정강은 서울시내의 안가에서 한달간 고문을 견디며 경
찰이 어디까지 조직의 내막을 알고 있는지를 관찰했다. 경찰은 '반
제 전국학생동맹'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경찰의 수사가 종
결된 것은 7월16일쯤이었다(김정강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64년 7월18일 양찬우 내무부장관은 '학생데모 배후조종 사건'
이란 제목의 '불꽃회 사건'을 발표했다.
김정강은 1966년에 출감하여 14년간 노동현장에서 위장취업해 좌
익노조활동을 했다. 그는 감옥에서 만난 숱한 미전향 간첩들로부터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되고 1980년에 비로소 자신의 신념이던 친북-사
회주의노선과 결별한다.
기자는 '불꽃회'사건 이후 34년이 지난 최근에 김정강씨를 만났
다. 지금은 전향해서 보수 우익의 노선을 견지하며 사회평론가로 활
동중인 61세의 김정강씨는 자신을 '역사에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했다. '불꽃회'를 만들 당시 그는 "세상을 마르크스 이론에 끼워 맞
춰 도식화 하는데 만 골몰한 나머지 현실감을 잃었던 시절"이라고
회고하면서 "그래도 박정권때 법치주의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나의
법정투쟁이 성공하게 되었다. 법치주의는 좌익에게 빠져나갈 틈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박정희씨가 미국의 압잡이였다는 것은 말도
아니지요. 당시 우리의 삶은 조선조때부터 지속되어 온 반 봉건시대
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국민소득이 1인당 80달러로 아프리카의 '가
나'와 동급이었지요. 우리가 보기엔 사회주의쪽으로 가야 성공하기
쉬울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그 후 착오였음이 드러났고 박
정희는 이 땅에 자주적인 현대국가를 건설하고 자본주의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물질적 토대를 만드는 데 성공한 반면, 우리
같은 '박정권의 성공을 부정하는 좌익'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자신의
물질적 성공을 합리화하는 이념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 점은 끝내
제 가슴속에 무겁게 남아 있을 겁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