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을 맞은 스페인 사람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지 500주년, 제2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해….

하나 더 있었다. 수도 마드리드∼세비야(471㎞) 구간 고속철도 AVE의
개통. 그해 4월20일에 개통된 AVE는 세계에서 4번째로 고속철 '보유국'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년 후 ETR-500을 선보인 이탈리아가 4대 '생
산국'으로 등장함으로써 그 의미가 반감되기는 했지만, 스페인 사람들로서
는 일대 사건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AVE는 프랑스 TGV의 '사촌 동생'. 역시 TGV 차량을 수입하는 우리로서

는 AVE의 성공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대성공.

그러나 AVE는 두가지 점에서 한국과 달랐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두 가지이다. 우선 AVE는 노선 선정에서 일반의 상식을 뒤엎었다. 고
속철도 노선을 하나만 고른다면? 당연히 제1-2 도시를 잇는 것이다. 프랑
스의 파리∼리옹, 한국의 서울∼부산…. 그러나 스페인은 제1 도시 마드리
드를 출발하되, 목적지로 제2 도시인 북동쪽 바르셀로나 대신 남서쪽의 고
도 세비야를 선택했다.

그 배경을 설명하는 스페인의 알스톰 시장분석부장 고메즈 아즈피쿠에
타씨는 태연했다.

"(세비야는 바르셀로나에 비해) 낙후지역입니다. 그러니까 더 배려해
주어야죠. AVE 개통 후 낙후성을 상당히 극복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마드
리드∼바르셀로나(606㎞) 구간을 건설중이잖아요?" .

이런일이 우리나라에서 있었다면 혹시 청문회라도 열리지 않았을까 하
는 생각이 선뜻 스쳐갔다. 지역감정도 우리 못지 않은 바르셀로나와 세
비야이다. 물론 '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실권자가 세비야
출신이었다느니, 뇌물을 먹었다느니…. 또 하나. 스페인은 프랑스와 독
일이 치열한 수주)경쟁을 벌일 때 '묘안'을 생각해 냈다. 어느 한 나라의
손을 들어 주어 평생 원수로 지내느니 절충안을 찾은 것이다. 차량은 TGV,
신호-제어 시스템은 ICE. 양측을 동시에 협력의 파트너로 끌어 안을 수 있
는 방안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가 총예산의 80%를 차지하는 차량부분을,독
일이 20%인 신호-제어 시스템을 가져갔다. 스페인은 몫이 적었던 독일측이
항의하자 AVE 노선 운용용 화물 기관차 11량을 추가로 사 주었다. 그래서
프랑스 52%, 독일이 48% 차지로 조정됐다. 이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스페인이 유럽내 약소국가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양다리 걸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100% TGV를 선택한 한국은 화끈했다는 생각이 든
다.

우리와 스페인의 고속철도 사업의 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페
인은 AVE의 유지-보수를 몽땅 프랑스에 맡겼다. 알스톰사에 맡겼던 유지-
보수를 중간에 한번 인수하려다 어려워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5년 계
약후 한번 더 연장했다.

스페인의 공업기술은 한마디로 별로다. GNP의 40%가 관광수입인 나라인
만큼 자체 기술회사가 거의 없다.

물론 스페인 관계자들은 "유지-보수는 알스톰에 맡겼지만, 직원들은 모
두 스페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스페인 사람인 알스톰 정비공장
장 알빈센트 가르시아씨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결정일 때도 당신이 하나"라는 물음에는 "그 때는 프랑스 알
스톰 본사에 물어 본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경부고속철도 개통 후 1년간은 프랑스의 수퍼바이저와 공동
으로 유지-보수를 한 후 인수할 방침을 세웠다. 기술이전까지 요구하는 마
당에 유지-보수쯤이야…. 이게 한국관계자들의 판단이다. 그러다가 무리가
아니냐는 지적이 일자 최근 개통 후 '1년'을 '2년'으로 연장했다.

이 문제를 유럽의 고속철도 전문가들에게 집중적으로 물어 보았다. 대
부분 "장기적으로는 한국이 잘하고 있다"는 답변이었다. 그러나 전제 조건
이 따랐다.

"경부고속철도 개통까지 남은 기간 동안 한국이 충분히 배울 경우에만
그렇다는 뜻입니다.".

(* jsbang@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