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의원의 입장 ##.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1월10일 국회에서 읽은 연두교서를 통해서
'대혁신 운동'을 제창했다. '혼돈과 침체 속의 후진의 굴레에서 결연
히 벗어나 우리의 조국을 근대화시켜야 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설정하
고 국민의 정신적 혁명을 기조로 정치적 정화운동, 사회적 청신운동,
경제적 검약증산 운동을 전개해나가자'고 호소했다. 박정희는 혁명
직후에도 재건국민운동을 벌였으나 이 운동의 발상자인 김종필의 표
현을 빌면 '관청을 하나 더만든 꼴'이 되어버렸다. 박정희의 경제발
전 전략을 물질중심이라 오해하는 사람들은 그가 여러 차례 시도한
의식개혁 운동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는 자조정신에 기초한 자립경제 건설, 자립경제에 기초한

자주국방 건설, 자주국방에 기초한 진정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란 3

단계의 국가발전 전략을 갖고 있었다. 초기에 박정희는 한국인의 자

조정신을 자조정신으로 바꾸려고 애썼다. 대혁신운동은 재건국민운동

에 이어 그가 시도한 두번째 의식개혁 운동이었다. 이것도 별 효험이

없자 4년 뒤엔 '제2경제', 즉 실물경제를 뒷받침하는 경제윤리를 '제

2경제'라고 하여 의식개혁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도 지식인층으로부

터는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은

박정희로선 네번째의 국민의식개혁운동이었던 것이다.

김종필 공화당 의장은 대혁신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소집한
중앙상임위원회에서 다섯 가지 행동강령을 강조했다.

1. 현실을 직시하자. 2. 발을 굳게 땅에 딛고 발전적 자세를 취하
자. 3.집권당의 구성원이란 특권의식을 버리자. 4. 국민의 가슴에 의
욕과 자각의 불을 붙이자. 5. 공화당은 사조직이나 붕당과는 다르니
당중심으로 단결하자.

우리나라에서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 국민의식 개혁 운동을 벌이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왔다. 김대중정부가 벌인 '제2의 건국운동'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오르면 상당히 멀리 간다. 1964년1월29일 조선일보 1
면에는 쟁점 지상토론 기사가 실렸다. 박대통령이 제창한 대혁신운동
을 두고 김동성 공보부 장관과 김대중 민주당 대변인이 맞섰다. 김대
중 의원은 하향식 혁신운동을 비판했다.

"혁명후 국민운동본부나 만들어 하향식으로 했으니 혁신이 될 리
가 없었다. 정부는 자기 할 일이나 하고 웃사람부터 모범을 보이면
국민들은 따라갈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혁신운동만이 민주사회에서
가장 효율적이다.".

김장관은 혁신운동의 방법론으로서 '언어순화, 아름다운 국민가요
제창 운동, 독서운동, 문맹퇴치운동' 등을 제안했으나 김대중 의원은
그런 생활운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정치정화 운동의 중요성을 강
조했다.

한일회담 반대 운동이란 태풍이 다가오고 있던 1964년 봄, 정계는
박정희-김종필의 공화당과 윤보선의 민정당이 대극점을 이루고 있었
다. 김영삼 의원은 민정당의 대변인이었고 김대중 의원은 장면계열,
즉 구 민주당 신파계인 박순천이 대표로 있던 민주당의 대변인이었
다. 이 민주당은 윤보선-김영삼 세력에 비해서는 온건한 편이었다.한
일회담에 대해서도 윤보선의 민정당은 '무조건 반대'인 데 비해서 박
순천과 김대중은 '원칙은 찬성, 각론에서 반대'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최근에 펴낸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에서 '윤보선측에서 (정부를) 매국노라고 몰아붙이면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그는 '지금은 국가적
이익을 확보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국교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때가 왔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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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합동 연설회에서도 김대중 의원은 윤보선의 극단론에 맞서 대
안 있는 반대를 했다고 한다.

"국교는 정상화해야 한다. 다만 굴욕적인 부분과 불이익 부분을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는가. 기본조약의 초안은 이렇게 고치고,
어업문제는 이렇게 고쳐야 한다.".

이런 식으로 연설했더니 청중들은 흥분된 분위기인데도 김대중 의
원의 주장에 납득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감정에 영합하여 자기 소신을 굽히는 일은 정치인이 할 일이 아니라
정치꾼이 할 짓이었다'고 회고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