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해질 무렵 서울 광화문 부근에 있는 찻집 샬롬. 시인
김용택(51)은 다 낡아 너덜너덜 해질 것 같은 노트 한 권을 꺼냈다.

겉장엔 '초가 일기'라고 쓰여 있다. 사랑에 홀로 춥고, 세상에
외롭고, 풍경에 쓸쓸하던 시절, 그는 누군가 와서 외로움과 슬픔과
견딜 수 없는 적막함을 허물어 주고 퍼내줄 것 만 같아 늘 해지는
들길에 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고 시가 찾아 왔다.

아무 곳에나 버려둔 시들을 한 여인이 땀을 뜨듯 만년필로 깨끗
하게 정리, 이 세상에 단 한권밖에 없는 시집을 만들어 주었다. 그
것이 '초가일기'였고, 이번에 열림원에서 '누이야 날이 저문다'는
시집으로 활자화됐다.

"그 여인이 누굽니까."
"안되야. 큰일 나.".

열림원 편집주간 정은숙씨가 "김용택 어린이"라고 부를만큼, 어
떤 무구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섬진강 시인'도 가슴에 묻어 두어야
할 여인은 있었던 것일까. 아직은 절대 비밀이라고 손을 내두른다.

김용택이 데뷔하기 10년 전쯤 쓰여진 이 시들은, "자기만의 사
사로운 가치를 소멸시켜가던 시절 내 방황의 흔적"이며 "춥고 배고
픈 겨울에 언 손을 부벼가며 쓴 내 청춘의 부끄러운 고백"이기도
하다. 그때가 70년대 전반쯤으로 농촌에 개량운동의 물결이 정착되
는 한편 서울의 정치는 그 질곡의 그늘이 짙어만가던 시절이었다.

'그리움 가득 채우며/ 내가 네게로 저물어 가는 것처럼/ 너도/
그리운 가슴 부여안고/ 내게로 저물어 옴을 알겠구나/ 빈 산 가득/
풀벌레 소낙비처럼/ 이리 울고/ 이 산 저 산 소쩍새는/ 저리 울어/
못 견디게 그리운 달 둥실 떠오르면/ 징소리같이 퍼지는 달빛 아래/
검은 산을 헐고/ 그리움 넘쳐 내 앞에 피는 꽃/ 달맞이꽃'('달맞이
꽃' 전문).

이문재 시인이 이 시집에서 가장 빼어난 시 가운데 하나로 지목
한 '달맞이꽃'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김용택에게 그 시절은 '저뭄',
'집',그리고 '여자'라는 단어와 이미지가 가난, 그리움, 외로움 등
과 함께 삶과 사랑을 변주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앉더니/ 그녀의 가슴에 내 머리
를 묻어주었다/ 수면이 가만히 흔들리며 얼고 있었다/그녀가 내 머
리를 쓸어주며/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울고 있다고 느꼈을
때/ 내가 그녀의 손을 더듬어 찾고/ 그녀가 내 머리에 얼굴을 부볐
다// 해는 어디나 지고 없었다/ 침침한 하늘에 별이 뜨고/ 집이 없
었다'('집이 없었다' 전문).

한달 동안의 서울 가출을 경험한 떠꺼머리 총각 김용택은 습작
시절이었음에도 이미 짧은 시의 진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작 "집
안 마당의 느티나무 가지가 바람에 부러져 지붕을 내려치지 않을까"
가 가장 큰 걱정이었던 평화 속에도 냉기와 고독은 뼛속을 시리게
했던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 김용택은 "이 시집을 다시 읽으니 가슴이 서늘하게 개어
온다"면서 "이 시집은 내 인생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집은 지난 88년 청하 출판사에서 출간된 후 절판됐다가 이
번에 이문재의 발문과 새로운 편집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또 풀빛
이 냈다가 절판됐던 시집 '그리운 꽃편지'도 문학동네에서 다시 나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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