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남성 상위로 꾸려져 내린 우리 나라에서 남녀가 맥락된 사
건에서 가해자는 항상 남자요 피해자는 여자라는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춤바람으로 뭇 여대생을 유린한 박인수는 분명 가해자요 유
린당한 여대생은 피해자다. 한데 스스로의 순결이나 정조를 지키지못
한 여자의 정조까지 법이 지켜줄 수는 없다는 파격적인 판결을 내려
이 천년래의 공식을 깨트린 것이다. 박인수는 여성의 적이냐 우군이
냐를 두고 한 대학에서 토론이 있었을 정도다. 박인수는 성의 노예로
부터 자유를 쟁취하게한 한국 여성사에 도표를 세운 악인이다. (이규
태 조선일보 논설고문).
1955년 7월22일. 서울지방법원 법정은 방청객과 기자들로 초만원
을 이루고 있었다.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결혼을 빙자, 1년간 70여명의 미혼 여성을
농락한 혐의로 기소됐던 박인수(당시 26세)가 혼인빙자 간음죄에 대
해 무죄선고를 받는 순간이었다. 재판장 권순영판사의 판결문은 그로
부터 4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희대의 명언으로 남아있다.
박인수 사건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던 50년대 한국의 웃지못할
풍속화다. 자유로와진 성 풍속도, 그러나 여성의 정조와 순결을 강조
하던 윤리의 이중 잣대, 미군 문화를 통해 전파된 춤 바람과 댄스홀…
이 모든 새로운 사회문화 코드의 조합이 박인수 사건으로 응축됐다.
대학 재학 중 전쟁 발발로 입대했던 훤칠한 미 청년 박인수는 해
병대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해군장교구락부(LCI),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댄스 홀을 드나든다. 1954년 제대한 그는 이후로도 해군 대위를
사칭,인기 댄스홀을 휩쓸며 여성 편력을 펼친다. 박인수가 만난 여성
들은 대학생이 대부분이었으며 고관, 국회의원 등 상류층 가정 출신
도 많았다. 검찰은 박을 혼인빙자 간음죄로 기소했지만 정작 이 죄는
친고죄. 박인수를 고소한 여성은 둘 뿐이었으며, 그나마 재판정에 증
인으로 출두한 여성은 너댓밖밖에 안됐다.
재판에서 박인수는 혼인 빙자 간음 혐의를 부인하며 "내가 만난
여성 중 처녀는 미장원에 다니는 이모(23)씨 한사람 밖에 없었다"고
밝혀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또 "그들과는 결코 결
혼을 약속한 사실이 없었으며 약속할 필요도 없었다…댄스홀에서 함
께 춤을 춘 후에는 으례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었으므로
구태여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빙자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권순영 판사는 박인수 피고에게 공무원 자격 사칭에 대해서만 2만
환의 벌금형을 과했다. "댄스홀에서 만난 정도의 일시적 기분으로 정
교 관계가 있었을 경우 혼인이라는 언사를 믿었다기 보다 여자 자신
이 택한 향락의 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는 게 "보호
가치가있는 정조를 보호한다"는 말에 이어지는 무죄판결 이유였다.
그러나 세간은 떠들썩했고 검찰은 항고했다. 항소심에서 박인수는
징역 1년형을 받았고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유죄가 확정됐다."댄
스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내놓은 정조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고의
로 여자를 여관에 유인하는 남성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는 게 유죄
판결이유였다.
그로부터 40년. 1994년 성폭력 방지법이 제정되면서 우리 법전에
서는 '정조'라는 말이 사라졌다. 예전 형법에서 강간 추행 등은 '정
조에 관한 죄'로 분류됐지만, 부녀자에 한정해서 적용되는 '정조'라
는 단어가 여성을 수동적이고 상대적인 위치에 놓는다고 여권운동가
들이 삭제를 강력하게 요청한 결과다. 최영애 성폭력상담소장은 "성
범죄는'성적 자기 결정권' 유린"이라며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
말을 쓰자"고 주장한다. '보호가치있는 정조'란 것도 문제로 여겨졌
다. 술취한 여성이 추행당했을 때 오히려 그 여성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 우리 사회지만, 이제 직장 마다 성희롱 방지 교육이 제도화되면
서 분위기도 바뀌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