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르, 따르르…. 비행기 사격으로 리어카에 총알이 맞고 튀는
소리가 들렸다. 10분 후 땅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리어카에 탔
던 손녀는 영문도 모른 채 앉아 있었다. 우리만 살겠다고 너는 생각
지도 않았구나. 이건 기적이다"(50년 12월9일 사리원).
1·4후퇴 때 평양에서 피란길에 나섰다가 고향엔 돌아가지도 못한
채 서울에서 90세로 지난 85년 사망한 차인호씨가 생전에 쓴 '6·25
피란일기'의 한 구절이다. 서당 학력이 전부였던 차씨는 피란길에서
틈틈이 쓴 메모를 중심으로 55년에 가족들의 피란생활을 기록, 자식
들에게 전한 것이다.
차씨는 평양시 능라도에서 채소밭을 가꾸며 두 아들 등 일가 8명
과 사는 농부였다. 50년 12월4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고향을 떠나면
서 차씨의 일기는 시작된다. "어른들도 괴로운데 손자 정남(당시
8세)이는 잠도 못자고 밤길을 가는 데도 앞장섰다. 다섯살짜리 정순
이는 추워도 보채는 일이 없다"(50년 12월10일). 이들의 피란길은
고단했다. 손에 쥔 것은 광목 몇 필과 반지 몇 개뿐. 그들을 반겨주
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사리원, 개성, 수원을 거쳐 30여일만에
도착한 곳이 경기 평택시 숙성리. 여기서 이들은 모처럼 평화를 되
찾았다. 3개월 뒤 국군이 북진하면서 이들도 고향 찾아 북행길에 나
섰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의 이북출신 피란민에 대한 편견에 그는
몸서리치기도 했다. 평택을 떠나면서 그는 "말끝마다 '이북놈들' 하
는 소리를 안 듣게 된 것이 시원하다"(51년 1월4일)고 기록했다. 마
을마다 조직된 향토방위대는 이들의 북행길을 막기도 했다. 북쪽에
가면 인민군이나 첩자가 된다는 이유였다. 그보다 더 그를 괴롭힌
것은 북에 두고 온 출가한 딸이었다. "무얼 먹고 살까. 모두 굶어죽
었을 것을 생각하니 사지가 녹아온다." 그는 일기장 곳곳에 이처럼
딸을 그리워하는 아비의 심정을 담았다.
휴전이 되고 55년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의 일기는 끝이 난다."이
제부터는 피란민이 아니다. 구청에서 호적을 만들고 서울시민증을
받았다. 남북통일이 되어도 서울이 제2의 고향이 될지도 모른다. 이
제 피란생활은 끝난 셈이다." 차씨는 그후 교복점을 운영하던 아들
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 차씨는 이 일기를 따로 1부를
더 써 두 아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이 일기를 6·25로 인해 평생 잊
지 못할 고통스런 가족사라며 가보로 남기라고 당부했다. 그는 죽는
순간, 북에 두고온 딸 생각에 눈을 제대로 감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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