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7월 인도네시아 전쟁이 끝나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
로 세계 지상에서 총소리가 안 들리게 됐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전쟁
의 종막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자신을 갖게 만들었다.반
둥회의는 이런 배경 속에서 개최됐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
에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색인종의 정부 29
개국 대표들이 모였다. 그 중에는 인도의 네루, 중국의 주은래, 버마
의 우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도 끼어있었다. 이것은 주은래의
말대로 "단결을 굳건히 하기 위한 모임이지, 이데올로기를 토의하기
위한 장소도, 싸움을 위한 장소도 아닌" 아시아의 힘과 아시아의 결속
을 다짐하는 모임이었다. ( 홍사중·조선일보논설고문 ).

1955년 4월 18일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서부 자와바라트주의 주도

반둥은 1810년 네덜란드가 이 도시를 세운 이래 가장 중요한 손님들을

맞느라 분주했다. 아시아 23개국과 아프리카 6개국의 대표들은 드위와

르나궁에 모여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AA회의)를 열었다. 개최지의

이름을 따서 보통 반둥회의라고 불리는 이 모임은 제2차 세계대전 종

전 이후 잇달아 독립한 구 식민지 국가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이 회의를 마련한 것은 콜롬보 그룹이라고 불리던 인도네시아, 인
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버어마의 5개국이었다. 남-북한, 중화민국,
남아공, 이스라엘 등 어느 한 진영에 현저하게 치우쳤거나 인종차별적
인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 국가들이 초청됐다. 하지만 불과 얼마전 티
벳을 무력으로 점령해 강제 병합했던 중국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29개국의 국기가 휘날리는 회의장에 자리를 함께 한 320명의 사절
단은 14억명을 대표했으며 이는 당시 전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
지하고 있었다.

수카르노 인도네시아대통령은 개막연설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색인들이 대륙을 넘어 회합을 가졌고 침묵하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다시 찾았다"며 "현대적인 포장을 한 모든 식민주의를 타파하자"고 목
소리를 높였다.

'식민지 경험'과 '가난' 이외에는 별다른 공통점을 갖지 못했던 참
가국들은 토론 주제마다 의견을 달리 했다. 가장 큰 쟁점은 동부 유럽
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소련의 정책을 서방 제국주의와 같은 성격의 것
으로 보아야 하는가였다. 격론 끝에 결국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결의안이 채택됨으로써 소련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됐다.

반둥회의는 4월 24일 '세계 평화와 국제협력 증진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고 폐막됐다. 보통 '반둥 10원칙'이라 불리는 이 선언은 비동맹
과 중립주의, 상호협력 등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서방 자본주의 국가
와 동방 사회주의국가에 의해 양분되던 국제정치 무대에 '제3세계'라
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

반둥회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주도되던 국제
무대에 많은 새로운 스타들을 탄생시켰다. 개최국의 이점을 십분 활용
한 수카르노, 중국의 강경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는데 탁월한 수완을 보
인 주은래, 반둥선언의 기초 정신을 제공한 인도의 네루, 중동의 강력
한 지도자로서 부상한 이집트의 나세르 등은 이 회의를 통해 국제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반둥의 회의장에서 드러난 각국의 상이한 이해관계는 곧 이
어 발생한 중국-인도 국경분쟁, 중소분쟁 등으로 심화됐고 결국 알제
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신생국의 수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반둥회의를
계기로 등장한 '비동맹' 그룹은 점차 세를 더해갔고 이들은 60, 70년
대를 지나면서 국제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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