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문학소년 시절, 간혹 'TV문학관'을 본 기억이 있다. 김동리
'등신불', 김원일 '도요새에 관한 명상', 이청준 '눈길' 같은 소설을
화면으로 보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즐겨야할 10대 문학지망
생은 자못 진지하고 심각했던 것 같다. 박정희씨가 죽고 전두환씨가
권좌에 오르던 그때, 세상에 눈뜨기 시작한 나에게 삶은 진지하고 심
각한 소설처럼 무겁고 어두웠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5월 마지막 일요일, 'TV문학관'이 부활했
다.그 사이에 간간이 부흥을 위한 안간힘이 있었으나, 소재 빈곤과 제
작비문제로 중단됐다고 한다. 점점 부박해져 가는 시대 분위기와도 상
관있을 것이다. 누가 지금, 그것도 텔레비젼에서 진지하고 심각한 문
학작품을 감상하려 하겠는가.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가는 '촌
놈'으로 왕따당할 이 살벌한 가벼움의 시대에.

오정희 소설 '새'를 첫 회 원작으로 삼은 건, 시류에 편승할 마음
이 전혀없다는 선언일 게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남매가 폭력적 세상
에서받는 상처와 일탈의 환상을 끔찍하고 기괴한 인물과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을 맘 편히 볼 시청자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
할머니와 외삼촌과 큰아버지 집을 전전하다, 떠돌이 아버지와 부산 달
동네에 살게 된 남매의 이웃은 정말 불우한 사람들이다. 창녀 출신 새
엄마, 외로움 탓에 변태가 된홀아비, 레즈비언 부부, 불구 아내를 보
살피며 사는 우울한 악사. 그런 이들과 한집에 사는 남매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남동생은 지옥같은 현실로부터 새처럼 날아가고 싶어한다. 남동생
의 누나이자 엄마 노릇을 하는 사춘기 여자아이는 밤마다 얼굴없는 엄
마가 아버지에게 매맞는 꿈, 새엄마가 도망치다 아버지에게 붙잡히는
꿈, 주위 사람들에게 성폭행 위협을 받으며 도망치는 꿈, 그런 꿈들을
꾼다. 아버지가 문득사라지고, 남동생은 겁없는 남자가 되겠다며 깡패
들과 어울리다 '새'가 되어 날아가고, 그러면서 우리의 불우한 누이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성년을 맞는다.

텔레비젼이라는 속물들 세계에 가끔 외로운 예술가가 등장하는 건
나쁘지않은 일이다. 예술가는 우스꽝스러워진 처지에 더 뼈 속 깊이
외로움을 느끼겠지만, 속물들에겐 가끔 각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TV문학관'에 지지를 보낸다. '장미와 콩나물'을 더 재미있게 보게 된속물입장에서. (소설가-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