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옐친(68)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남부 흑해 연안에서 따스
한 햇빛을 받으며 모처럼 마음 편한 휴가를 즐기고 있다. 지난 21일부
터 휴양도시 소치에 있는 대통령 여름별장 '보차로프스키 루체이' 에
서 '단기간의 휴가'에 들어간 것이다. 가벼운 독서와 산책, 그리고 손
자들과의 전화통화 등이 옐친 대통령이 휴가기간에 하고있는 중요한
일들이라고 크렘린궁 측은 밝혔다.

그러나 그동안의 격무로 지친 옐친 대통령의 심신을 진정으로 달래

주고 있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개각용 인사파일을 들여다 보

면서 낙점을 하는 일"이라고 옐친 측근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옐친

대통령은 이번 세르게이 스테파신 총리 내각 등장으로 불가피하게된

개각을 하루아침에 단행하기 보다는, 하루에 몇명씩 신임장관을 발표

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그동안 침해됐던 '인사권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1일 옐친 대통령이 소치로 갑작스런 휴가를 떠나자, 그의 건
강 이상설이 다시 불거져 나왔다. 특히 18일 모스크바를 방문중인 호
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와의 회담이 전격 취소된 직후에 나온
조치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각종 질병에 시달려온 옐친 대통령의
노쇠한 육체가, 그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의회와의 정면대결을 벌이
느라 누적된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견뎌내지 못한 것으로 풀이됐다.또
승리감으로 긴장이 풀리면서 그동안 '정신력으로 버티던' 육신이 허물
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오는 28일 모스
크바에서 예정돼있는 김대중-옐친 대통령간의 정상회담과 관련, 모스
크바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그러나 크렘린궁 관계자들은 옐친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너무 극화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최근 의회와의 격전으로 인해 "다소 피
로가 쌓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심각한 편은 아니다"라는 것이 이
들의 주장이다. 정말로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면, 비행기로 2
시간이상 날아가 다시 헬리콥터로 갈아타고 가야 하는 소치 별장으로
휴가갈 것이 아니라,모스크바 중앙병원(일명 크렘린 병원)에 입원했을
거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번 옐친 대통령 소치 휴가는 "최근 하원과의 투쟁에서의
승리로, 휴가를 즐길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
다. 그러나 왜 지난 21일 무슨 특공작전이라도 하듯, 크렘린 출입기자
들을 따돌리면서 급작스럽게 소치 휴가를 떠났는지에 대해 적절히 해
명하지 못하고 있다. "원래 대통령 성격이 그렇지 않느냐"는 궁색한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옐친 대통령은 지난 프리마코프 내각 8개월동안 정말 마음고생을
했다. 장관 한 명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었으며, 검찰총장 해임안이
두번이나 상원에서 부결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또 귀여운 막내딸
타티야나 디야첸코(39)를 음해하는 온갖 흉흉한 이야기들이 방송과 신
문지상을 뒤덮어도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옐친 대통령은 삶의 마지막 투혼을 불태웠다.
역시 왕년의 별명이 부끄럽지 않은 '승부의 명수'였다. 비록 노쇠해서
이빨이 빠지기는 했지만, 하이에나 몇 마리쯤은 거뜬히 죽일 수 있는
사자임을 만천하에 과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몸은 옛날같지 않은
것 같다. 한 측근은 "며칠 쉬면 옐친 대통령의 기력은 곧 회복될 것이
며, 모스크바에 돌아와, 28일 김대중 대통령과 '개각 후일담'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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