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최대은행인 도이치 은행의 롤프 브로이어 행장의 명함에는
미국계 금융기관들이 즐겨 사용하는 CEO(최고경영자)라는 단어가
없다. 대신 '이사회 스포크스맨(spokesman)'이라고 찍혀 있다.

우리말로 변역하면 '대변인'이란 뜻이다. 우아하게 은박을 입힌
연례 보고서에는 이사회 구성원들이 엄격히 알파벳 순서로, 직책
표시 없이 담당업무 및 관할지역 본부와 함께 표시돼 있을 뿐이다.

특히 다른 독일계 은행과는 달리 이사회 임원들 자신이 그들의

1인자(대변인)를 선출한다.

행장이 이사회 의장직을 맡고는 있지만 '이사회 임원중 한명'일
뿐이며, 이사회 멤버들은 공식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
한 의미이다. 물론 여기에는 행장 한 사람의 독단적 경영에 따른
폐해(부실여신 증가)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한다.

송종한 도이치은행 서울지점장은 "도이치은행은 경영권이 이사
회 전체 멤버에게 골고루 나눠져 있기 때문에 만장일치제로 이사회
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어떤 사안에 대해 이사들간에 합의
가 이뤄지지 않으면 기꺼이 결정을 다음으로 미루고, 다음 회의 때
까지 개별 접촉을 통해 설득작업을 펼친다는 설명.

독일 경제력의 '상징물'이랄 수 있는 도이치은행은 민주적 경영
과 함께, 고객과의 '신뢰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
다. 돈을 빌려줄때는 수개월에 걸쳐 신용조사를 철저히 하지만, 한
번 '믿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거래기업이 일시적 경영난
에 빠져도 적극 밀어준다는 것.

한국이 IMF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도이치은행이 우리 정부에
보여줬던 호의도 이러한 신뢰관계의 산물이다. 한국에서 난리가 났
다고 하는데도 도이치은행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금 지원을 해주고,
외채만기 연장 때도 앞장서서 한국을 도왔다.

홍보실 데트레프 램스돌프 박사는 "당시 도이치은행내의 한국
데스크들은 여러가지 정보를 분석해볼 때 한국이 당장은 어렵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판단, 마지막까지 비관적이지 않았다"고 회
고한다.

도이치은행이 자체 신용정보 분석기술을 세계 일류수준으로 자
부하고 있는 것은 지난 120년간 독일 및 유럽 일류 기업들과 맺어
온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다. 알리안츠(보험사), 다임러 벤츠(미국
크라이슬러와 합병), 피아트, 뮌헨재보험사, 하이델베르크 시멘트,
콘티넨털 등….

사실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우량 대기업들은 죄다 도이치은행이
대주주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도이치은행의 보유주식을 시가로
따지면 무려 420억마르크(약 27조원)에 달한다는 조사보고서도 나
와있다.

도이치은행은 이들 거래 기업들의 주식을 보유하면서 은행 임원
들을 기업체 경영감독위원회(우리나라 이사회와 비슷한 개념)에 파
견, 경영에까지 관여하고 있다. 경영전략과 신규투자 결정 등 주요
이슈에 대해 은행측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만약 경
영진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경영진을 갈아치우기도 한다.

산업자본이 금융산업의 지배를 호시탐탐 노리는 한국적 현실과
는 반대로, 금융자본이 민간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셈. 도이치은행
은 필요에 따라 거래기업간의 M&A(인수합병)도 마음대로 시킬 수
있을 정도로 독일 산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98년초 도이치은행은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철강업체
크룹스와 티센을 미국식 적대적 M&A 방식으로 합병시켜 버렸다. 당
시 이 합병은 자본금이 작은 '크룹스'가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티센'을 인수했다고 하여 유럽대륙이 떠들썩했었다.

합병후 인력감축을 우려한 노조가 당시 맹렬히 반대를 했으나,
경영효율성 제고가 더 우선이라는 도이치은행의 밀어붙이기에 노조
와 경영진 모두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경
영간섭을 받는 독일 기업들이 도이치은행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사
실. 도이치은행 홍보실은 "독일 기업들은 도이치은행과 거래를 트
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경영이사회에 도이치은행 임원들을 초청
하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도이치은행이 관리하는 자산은 무려 7325억달러(한화 880조원)
로 전세계 랭킹 1위다. 미국과 일본에 맞서는 독일경제의 자존심인
셈. 이 때문에 도이치은행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사랑과 신뢰도 대
단하다.

예를 들어 도이치은행 해외지점에서 근무하는 현지 직원들이 프
랑크푸르트에 오면 도이치은행 공항환전소에서 전표를 받아 아무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내릴 때 택시기사에게 택시값
으로 본인이 사인한 전표만 건네 주면 그만이다. 그 만큼 독일인들
이 '도이치은행'이라는 브랜드를 신뢰하고 있다는 얘기다.

롤프 브로이어 행장은 올 연초 "도이치방크는 이제 독일내 일등
은행의 자리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세계 금융시장
에서 미국, 일본은행들과 한판 승부를 겨뤄보겠다는 선전포고인 셈
이다.

90년대 초반 영국의 모건 그랜펠을 인수, 런던 금융시장에 확고
한 발판을 마련한 도이치은행은 작년말 미국의 8대은행인 뱅커스
트러스트(BTC)를 인수, 미국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까지 확보한
상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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