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미국의 최고마였던 시거(Cigar)가 은퇴했다. 시거는 상금을
1000만달러 가까이 벌어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화려한 은퇴식을
가졌을 정도였다. 현역서 물러나 시거를 일본의 어느 마주가 2000만달
러에 사려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일본중앙경마회가 2500만달러를
불렀다. 마주도 솔깃했지만 "미국인 자존심이 상한다"며 팔지 않았다.
종마로 변신한 시거는 다음해부터 한번에 7만5000달러씩 받고 30여
마리 암말과 '사랑'을 했다. 그러나 어느 암말도 새끼를 갖지 못했다.
알고보니 시거는 희귀하게도 정자가 없는 말(무정자마)이었다. 거
액을 날려버릴뻔한 일본으로서는 안도의 한숨을 쉴 일이었지만, 일본
경마의 현주소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외국인들은 일본을 '말의 천국(Horse's Paradise)'이라고 말한다.
1955년 설립된 일본중앙경마회 소유 경마장이 12곳(현재 운영은 10
곳)이며, 지방공공단체가 운영하는 경마장도 40여곳이다.
일본은 경마에서 서양과 어깨를 겨루겠다며 대규모 투자를 했다.좋
은 종모마라면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수입했다. 1971년에는 영국의 더
비우승마 7두를 수입하기도 했다. 일본은 지금도 좋은 말이 있는 줄
알면 줄줄이 수입한다. 일본은 경마장도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들
여 근사하게 지었다.
그러나 돈만 쏟아붓는다고 하루 아침에 경마선진국이 될 수는 없는
일. 일본은 재팬컵(Japan Cup)을 만들어 세계각국의 유명한 말을 도쿄
경마장에서 달리게 했다. 엄청난 상금을 걸고, 모든 경비도 주최측이
부담하는 가운데 제1회 대회가 1981년에 열렸다. 그러나 1984년 당시
미국의 최강마 존 헨리와 세계적인 기수 빌 슈메이커(생애통산 8333승)
가 출전해 이목을 끌었을 뿐 세계경마계의 반응은 '별로'였다. 그러나
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물량공세와 치밀한 교섭으로 재팬컵을 세계적
대회로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현재 세계의 일류마들은 엔화를 벌기 위해 매년 11월 마지막 일요
일 도쿄경마장의 잔디주로를 찾고 있다. (이시영 경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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