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생각의 집'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었지만 나라를 잃은 한
국민에게 그것은 '민족의 집'이었다. 일본인들에게 땅과 재산을 모두
빼앗겼어도 한국말이 있는 한 한국의 민족과 문화는 멸하지 않았다.창
씨개명으로 한국인의 핏줄을 끊으려고 했고 일본말 상용 정책으로 한
국의 혼을 짓밟으려 했지만 한국말을 지키고 가꾸어온 조선어학회의
학자들은 그에 굴하지 않았다.
일본인의 폭력 가운데 가장 악랄하고 무모한 것은 남의 나라 말을
빼았으려고 한 것이다. 20세기에 만들어진 어떤 무기도 언어를 파괴할
만큼 강력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 이어녕 이화여대석좌교수 '
1942년 10월 1일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등 조선어학회 핵
심 회원 11명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제 경찰에 체포돼 서울 종로경찰서
와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수감됐다. 왜 잡혀 왔는지 영문도 모른채
이들은 하루밤을 지낸 후 다음날 저녁 열차에 태워져 함경남도 홍원경
찰서로 압송됐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고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같은달 21일 이
병기 김선기 등이 서울에서 검거됐고 부산 동래에서 김법린이 체포되
는 등 탄압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어 안재홍 이인 이은상 등이 추가
로 붙잡히는 등 조선어학회 관계자의 검거 선풍은 해를 넘겨 4월초까
지 계속됐다.
당시 대표적인 조선어 연구자와 후원자 33명을 수인으로 만든발단
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 함흥 영생고등여학교의 한 학생
이 기차 안에서 불온언동으로 심문을 받았는데 일제 경찰은 이를 꼬투
리로 이 학교 교사였던 정태진을 체포했다.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을
맡아보던 정태진이 고문에 못이겨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 단체라고 허
위 자백하는 바람에 불똥은 조선어학회 회원 전체로 번진 것이다. 일
제 경찰은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사전 편찬을 통해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높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민중봉기를 통한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라고 몰고 갔다.
끝없이 지연되는 수사와 심문 끝에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에 대한 예
심은 2년만인 1944년 9월말에야 끝났다.그러나 가혹한 고문과 추위,굶
주림에 못이겨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회원
중 12명이 재판에 회부돼 1심에서 이극로(징역 6년), 최현배(징역4년),
이희승(징역 2년6개월), 정인승 정태진(이상 징역 2년) 등 5명이 실형
을 선고받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배경에는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서 조선
인을 완전히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일제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1930년
대 후반부터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킨 일본에게 창립(1921년) 이래 한
글날 제정, 잡지'한글' 발행, 한글 강습소 운영 등으로 조선어를 지키
는 보루였던 조선어학회는 눈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더구나 당시
조선어학회가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조선어사전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
도 막아야 하는 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5000년 역사를 가진 민족의 언어를 인위적으로 없애겠다는
발상은 성공할 수 없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던
조선어사전 원고(카드)는 결국 해방과 더불어 옥중에서 풀려난 그들의
손에 의해 1947년∼57년 '우리말 큰사전'(전6권)으로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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