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부치 수상 넘어선 정치력 과시…일본 정계의 '떠오르는 실세'로
부상
♧ '그림자 총리'(음의 총리) '나가타쪼(일본의 정치 1번지)에 남
은마지막 의리의 사나이' '자신의 정치사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6선중의원'.
현 일본 관방장관 노나카 히로무를 에워싸고 있는 수식어들이다.
'보캬힌'(VOCA빈-말 주변이 없고 아이디어도 없다는 뜻)이란 별명
이 말하듯,오부치 총리는 특별한 파벌도 없으면서 얼떨결에 총리에 오른
인물이다.
재임 초기 10% 전후의 지지도가 말해준다.
그러나 이같은 오부치 총리의 인기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지난 3월 24일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에 대
한 지지도가 무려 38.7%로 급상승했다.
일본 언론은 오부치 총리에대한 이같은 지지도 상승의 이면에는 노
나카 관방장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노나카 관방장관이 없다면 오부치 총리가 지금처럼 장기집권(?)을
할 수도 없고, 차기에 다시 도전하고 싶다는 말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이
일본 언론의 분석이다.
노나카 관방장관의 힘은 그러나 단순히 총리의 보좌역할선에 그치
는것이 아니다.
"노나카는 현재 일본내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2,3명 내에 들어
가는 인물이다." 가토 전 자민당 간사장의 발언에서 보듯 노나카는 오부
치 총리 그늘하의 정치인이 아닌, 총리를 넘어서는 힘을 가진 정치인이다
.
노나카 관방장관을 얘기할 때 반드시 따라붙는 것이 두가지 있다.
중졸에, 출신지가 쿄토(경도)라는 점.
노나카는 국졸 출신의 다나카 전 총리에 이어 '저학력 정치인'의
선두주자에 해당되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다음으로 그가 쿄토출신이란 점에서 더더욱 주목을 끈다.
한국인들의 이미지로 쿄토는 한국의 경주와 같은 고적으로서의 인
상이 강하지만, 일본인들은 '공산당'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도쿄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쿄토는 재일 한국인
과함께, 일본 언론의 금기사항에 해당되는 '부라쿠'(부락)가 가장 많이
모여있는 도시이다.
부라쿠란 조선시대 백정들이 모여살던 집단촌과 비슷한 곳으로 사
회 문화 경제적으로 보통 일본인들과는 전혀 다른 '이방지대'다.
부라쿠에 대한 일본인의 감정은 일제시대 당시 조선인촌보다 부라
쿠 주민에 대한 차별이 더 심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재일 한국인과 부라쿠가 밀집한 쿄토는 당연히 사회변혁을 희구하
는 소수파, 즉공산당의 아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노나카 관방장관은 바로 이같은 배경하의 부라쿠를 끼고 있는쿄토
내 작은 마을의 정장(한국의 동장)에서부터정치생활을 시작했다.
노나카가 부라쿠지역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했다는 점과 관련, 일본
언론들은 노나카 역시 부라쿠출신 인물로 보고 있다.
정장으로 정치무대에데뷔한 25세의 노나카는 그러나 쿄토내 다른
부라쿠나 재일 한국인 지역과는 달리, 반공산당 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된
다.
노나카의 반공산당 노선은 이후 쿄토 부지사로 올라가면서 더더욱
힘을 더해간다.
골프장 건설과 관련된 수뢰문제 등을 폭로하면서 공산당의 도덕성
에 치명타를 입힌 것을 비롯, 쿄토내 각 공무기관의 공산당계 노조와 산
하조직을 괴멸상태로 몰아간 것은 노나카의 중요한 정치적 업적(?) 중 하
나이다.
결국 공산당과의 전쟁 결과, 노나카는 28년에 걸친 쿄토의 공산당
집권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노나카가 도쿄 자민당 수뇌부로부터 특별한주목을 끌게 된 것은
바로 이같은 반공산당 성향과 부라쿠를 배경으로한전투적 성향 때문.
이후 지방출신에 머물던 노나카가 자민당의 공천으로 중의원으로
승급, 도쿄에 데뷔한 것이 1983년.
노나카는 도쿄 입성이후 쿄토부지사 출신이란 한계에도 불구, 그
누구보다도 빨리 도쿄에서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갔다.
다나카(전중) 사후의 다케시타(죽하) 가네마루(김환)로 이어지는
자민당내 파벌정치의 생리를 재빨리 파악, 다케시타와 가네마루의 오른
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선거학 박사로 통하는 다케시타 전 수상이 "노나카야 말로 선거를
가장 잘 아는 정치인"이라고 말한 것이나 가네마루가 이미 몇해 전 "가
까운 시일내에 관방장관에 오를 인물"이라고 칭찬한 것만 보아도 그의
정치 성향을 읽을 수있다.
이같은 노나카의 정치적 수완은 이후55년 자민당 집권을 무너뜨린1
993년의 호소카와(세천) 연립정권 때부터 빛을 발하게 됐다.
가네마루의 수뇌문제와 관련, 자민당 전체가 흔들릴 때 최후까지
가네마루를 지키며 자민당 수성에 나섰던 의리의 사나이가 바로 노나카였
던 것이다.
노나카의 이같은 일편단심 정치성향은 자민당을 비판하며 따로 신
생당을 창당한 오자와(소택) 현 자유당 당수와 전혀 대조적인 모습으로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오자와는 원래 '곤치쿠쇼우'(금죽소)라는 일본정치계의 상식적 용
어에서 알 수 있듯이 곤(금-가네마루),치쿠(죽-다케시타)에 이어지는 쇼
우(소-오자와)로, 자민당 제1 파벌의 후계자였다.노나카는 오자와의 변신
을 두고 그를 '악마'라고 부르면서 반오자와의 선두에서 있다.
이같은 배경을 고려할 때 현재 일본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오자와의
가장 큰 정적은 노나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일본 내각에서 관방장관이란 직책은 일본 정부의 정책방향을 판단
케하는 나침반과도 같은 것이다.
정치권으로 대표되는 내각과 행정부의 관료들과의 공감대를 정확하
게 파악, 공지하는 정부의 대변인인 것이다.정치권에서 가장 많은 결정권
을 가진 총리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관방장관의 임무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볼 때 관방장관은 주로서의 총리를 보좌하는, 종
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같은 관방장관의 개념은 노나카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국회 회기 기간 중 가장 잠을 많이 자는인물로 뽑힌 오부치 수상
의 범위를 넘어서면서 일본의 국가정책방향을제시하는 것이노나카의 지
금 모습이다.
이같은 노나카의 모습은 지난 3월 일본영해 침범 괴선박사건 때 가
장명확히 드러났다.
일본 언론들은 당시 준비상체제에 돌입한 일본을 냉정하고 계획적
으로 대처한 인물은 오자와 총리나 방위청 장관이 아닌 노나카 관방장관
이었다고 보고 있다.
30분 간격으로 전달된 일본 정부의 대응책과 현황을 설명하는 자리
에, 노나카는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으로 매스컴의 질문에 답했다.
노나카의 당시 대응방안은 오부치 총리와 관계자의 여론을 전부
수렴한 상태에서 내려진 결론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에기초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의 한 텔레비전 좌담 프로그램은당시 노나카의 모습을 통해 "
일본인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정치적 리더십을 다시 보는 듯했다."라고말
하기도 했다.
현재 노나카의 이같은 정치적 리더십이 가장 탁월하게 발휘되고 있
는부분은 세기말 일본의 제1 과제인 신가이드 라인과 유사입법 등 일본
의안보문제에 관한 것이다.
안보문제는 공교롭게도 정적인 오자와 당수의전문영역과 똑같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볼 때 각자의 안보론은 서로 타협불가능한, 상
이한 의견일 것이라고 예단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두사람은 안보문제에 관해서는 닮은꼴이다.
한반도 등 동북아 위기와 관련,미국이 전쟁에 돌입할 경우 후방에
서 지원하는 방안에 관한 신가이드라인 법안과, 일본 자위대가 독자적으
로 전쟁 등 유사시에 어떻게 대응할것인가를 규정하는 유사법안문제에 관
해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이다.
노나카가 일본정치의 금기사항이었던 안보문제를 화두로 삼는 이유
를두고 재무장을 주장하는 우파들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물이란 분석도
있다.
부라쿠를 배경으로 한 중졸 학벌의 노나카 관방장관.
그의 유일한저서인 '나는 싸운다'라는 책 제목에서 보듯, 노나카
의 남다른 정치적리더십은 일본내만이 아닌 한국 등 주변국에까지 영향
력을 더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