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폭격을 고발한 피카소의 그림을 본 독일 정보장교가 노발
대발하며 신문을 했다. "이게 당신이 한 짓이지". 그러자 피카소가 대
답했다. "천만에, 당신들이 한 짓이지." 우리는 자유를 위해서 스페인
에 왔노라-. 세계의 수많은 예술인들이 스페인 내란에 참전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그 피의 밭에서 소설과 시, 미술의 명작들이 꽃피고
열매 맺었다. 20세기는 집단 폭력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예술인들의
행동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

"소심하기만 한 시대. 그러나 여기 도전해 일어선 민족이 있다. 우
리 시대에 '인간의 존엄'이란 말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스페인 민중
들 덕택이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소련의 대표적 작가 겸 이즈베스챠 신
문 특파원 에렌브르크는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전쟁이 결국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의 승리로 돌아갔을 때 프랑스 행동주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이렇게 내뱉었다. "인류는 정의도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폭
력이 정신을 꺾을 수 있음을, 그리고 용기가 그에 상응한 보답을 받지
못할 때가 있음을 스페인에서 배웠다.".

'2차 대전의 리허설' '금세기 최대의 종교전쟁' '신병기의 실험장'….

1936년부터 1939년에 걸쳤던 스페인 내전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들
은 많다. 그 중의 하나는 '지식인들의 전쟁'이란 말이다.

1939년 7월 18일 오전 5시.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에 좌천돼 있던
프랑코 장군은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와 국민을 향해 쿠데타를 선언했
다. 스페인령 모로코 주둔부대들을 필두로 본토의 세빌리아 바르셀로
나 안다루시아 등 전국적으로 반란군이 궐기했다. 반란이 전국으로 확
대된 19일, 수상 카를레스 키로 사임에 이어, 같은 날 마르티네스 바
리오, 호세 힐라루 수상 등이 잇달아 취임했다 사임하는 사태가 빚어
졌다. 반란군은 압도적인 우세로 쉽게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대도시에선 반란군
이 민병들에 대패했다.

스페인 민중들의 힘은 전세계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다. 공황과 전체
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던 그들이었다. 앙드레 말
로, 어네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네루다, 시몬느 베이유, 조지 오웰, W H
오든…. 세계적인 지성들을 포함, 4만여명의 외국인 용병이 '정의'를
외치며 '국제여단'이란 이름으로 공화파 편에서 싸웠다. 말로는 직접
국제비행대대를 조직, 대령에 취임했다. 당시 전세계를 휘감고 있던
보수와 진보,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파시즘과 자유의 긴장-대립이 스
페인 내전 한판에 응축된 양상이었다. 히틀러의 독일과 뭇솔리니의 이
탈리아는 물론 프랑코를 도왔다.

내전은 그러나 1939년 4월 1일 공화파 정부의 완패로 끝났다. 사망
30만∼60만명, 망명 25만∼50만명. 전쟁은 그러나 말로의 소설 '희망',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
가' 등의 명작을 낳았다. 내전의 아픔을 인류사에 남을 걸작으로 승화
시킨 것은 피카소의 게르니카였다. 1937년 4월 26일 파리에서 활동중
이던 피카소는 자신의 고향 마을 게르니카가 독일 콘돌군단의 폭격에
의해 3시간만에 70% 초토화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2차대전, 베트남 전
쟁으로 이어지는 무차별 공중폭격의 효시였다. 폭력에의 증오, 동포에
대한 사랑을 담아 한달만에 그린 그의 대작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
른 프랑코 사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기증됐다. 지식인들은 일시
적으로 패했다. 그러나 보수와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의 정신은 20세기
지식인의 전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