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위어가는 한학 불지피고 재산마저 털어 문화재단에 ##.

♧ 지난 4월 14일 오후 6시, 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면 지둔리
지곡서당 근처 산 중턱. 한 줌 재로 변한 노학자의 '넋'이 대지
에 봄꽃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 이틀전, 스승의 급작스런
부고를 접하고 빈소에 모인 숱한 제자들은 장례 문제로 격론을
벌였다.

스승은 평소 묘를 쓰기를 거부했다. 가뜩이나 좁은 땅, 후손
들의 삶을 위해서다. 이 땅에 자신의 아무런 자취가 남지 않도
록 화장할 것을 원했다. 그러나 "그래도 스승의 무언가가 남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재의 일부라도 수습해서 묻자"는 의
견을 보인 제자도 많았다.

제자들은 결국 스승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유족은 고인
이 환경 보존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을 고려, 오염을 피하려
강물에 유해를 뿌리는 것마저 피했다. 돌아가기 한 해 전, 자신
의 전 재산 20억여원을 털어 후학들이 돈 걱정 없이 공부할 '터
전'을 마련했던 노 선비는 그 무엇에도 미련을 두지 않은 채 그
렇게 사부랑삽작 이승을 떠났다.

원로 한학자 청명 임창순(85)옹. 지난 4월 12일 오전 8시30분,
한평생 진정한 학자와 선비의 모습을 육화하며, 광복 이후 이땅
을 휩쓴 '속류 근대화'의 탁류 속에서 꿋꿋이 우리 것을 지켜냈
던 국학계 거인은 소리없이 일생을 마감했다.

그의 부음을 접한 지인과 후학, 제자들은 한결같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망구를 훌쩍 넘긴 나이는 속일 수 없음인
지 친한 벗처럼 자꾸만 찾아오는 육체적 질병 때문에 최근 들어
몇차례 입원하기도 했지만, 돌아가기 며칠 전까지도 자료수집에
몰두했던 그였다. 유언 비슷한 말을 남긴 것도 없다.

그는 7일 급작스레 입원하면서도 "별 것 아니다"라며 안동대
교수로 재직중인 아들 세권(52)씨에게 알리지 말라고 얘기했다
고 한다. 세권씨는 부친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지난 10
일 전해듣고 급하게 서울로 올라왔지만, 이미 청명은 표표히 떠
날 차비를 마친 상태였다.

청명은 최근 금석문(쇠나 돌로 만든 물건에 새긴 글자) 자료
수집에 몰두하고 있었다. 80년대 중반 내놓은 '한국금석집성 1'
속편을 집필하기 위해 삼국시대 이후의 금석문을 샅샅이 훑고있
던 중이었다.

그는 통일과 남북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그 관
심은 지난해 말, '통일시론'이라는 계간지 창간으로 꽃폈다. 입
원하기 직전까지도 그는 '통일시론'의 원고를 꼼꼼히 살폈다고
한다. 우리신문은 물론 일본 신문까지도 읽으며 관련 기사를 오
려 편집자에게 보낼 정도였다는 것. 그가 급작스레 돌아가지만
않았어도,'통일시론' 두번째 호가 지난 15일쯤 나왔을 것이라고
제자들은 말했다.

지난 해 6월 후학을 위해 가지고 있던 집과 땅은 물론, 문화
재까지 팔아 '청명문화재단'을 창립한 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던 그였지만, 학문을 향한 마지막 열정은 더욱 찬연하기만
했던 셈이다.

1914년 충북 옥천 태생인 청명은 가난 때문에 근대식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14세 되던 해, 충북 보은의 한 서당에서 평
생의 스승으로 삼은 성리학자 겸산 홍치유에게서 6년을 배운 게
고작이었다. 그뒤 집안 살림을 위해 막노동판에 뛰어 들기도 했
고, 광주리 장수를 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
에서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화투를 만들기도 했었다"고 고백하
기도 했다.

그러나 독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광복 직후 중등교원자격
시험에 합격, 경북중 교사로도 일했던 그는 문교부 교수자격심
의위에서 교수자격을 획득, 대구사범대-동양의약대-성균관대 교
수를 지냈다.

그의 최대 업적은 무엇보다 사위어가는 한학 연구의 불을 지
피고 댕겼다는 점이다. 4·19 교수단 시위 때 플래카드 문구를
직접 쓰는등 시위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에
서 해직된 그는 63년 서울 종로구에 태동고전연구소를 창립했다.

연구소는 초창기에는 일반인을 상대로 한 한문 강좌에 주력
했다. 70년대 들어 청명은 이 연구소를 국학전문 연구자 배출을
위한 아카데미로 변신시킨다. 장소도 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면
지둔리 현 지곡서당으로 옮겼다. 우리 한학 연구의 최고 아카데
미로 변신한 것이다.

지곡서당에서 배출한 제자 150여명은 국문학 사학 철학은 물
론, 법학 경제학 심리학 인류학 등 여러 학문 영역에 두루 퍼져
있다. 이곳서 배출한 교수만도 1기생인 박한제(서울대) 이광호
(한림대) 김종진(동국대) 성태용(건국대)교수를 비롯해 근 40명
에 이른다.

서울 태동고전연구소 시절에는 김정배 고려대 총장, 김용구
조동일 정옥자(이상 서울대) 교수 등도 수강했다고 한다.

청명은 서지학과 문헌 고증에도 일가를 이뤄 문화재위원장을
지냈다. 특히 초서 해독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게 중평.

지난 해 9월 작성한 경복궁 흥례문 상량문에서는 '국민의 뜻
을 모아 IMF를 극복할 것'을 기원했으며, 지난3월에는 당시 200
여수를 우리말로 풀이한 '당시정해'를 40여년만에 다시 고쳐 출
간하는 등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
의 서예' '단권신역 옥루몽' 등의 저작을 냈다.

강직한 선비로 평생을 지낸 그가 가장 좋아했던 어구는 '매
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을 추위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
는다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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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 임창순 선생님을 생각하며
한글전용 주장하던 한학자
예절 무시하던 '이상한 노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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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우나? 자, 이것 피우게. 고작 기호품 때문에 계속
불편해하지 말고….".

한학자라면서 전통적인 예절을 싹 무시하는 이상한 노인네와
의 만남 이후에도 이 노인네의 이상한 구석은 그 뒤로 겪을수록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앞지른다 하면 될 것을 왜 추월한다 하지? 짓밟는다 하면
될 것을 왜 꼭 유린한다고 하나?"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한학자
선생님은 아무리 보아도 유별난 노인네였다.

그 뒤로 사서삼경을 외워 바치는 장학생의 의무를 다하지 못
하면 조금의 사정도 없이 장학생에서 쫓아내는 비정한 노인네의
모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이 노인네는 학생들과 어울려 허
물없이 몇 시간이고 같이 노는 천진한 모습으로 그런 비정한 모
습을 싹 씻어 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정이 들게 만드는 수완도
좋은 노인네였다.

그런가 하면 당신의 제자들이 엄청 잘났다고 굳게 믿으시고
는, 그들이 단순한 한학자가 아닌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과 발
전에 이바지하고 사회정의 구현과 민족의 장래를위해 일하는 학
자가 되기를 바라는 욕심 많은 노인네였다.

내가 대학 전임교수가 되었을 때, "제발 교수자리를 목숨줄
처럼 연연해하는 교수는 되지 말게" 하신 말씀이 삼삼해, 이 못
난 제자의 편한 교수생활을 지금까지 조금은 방해하고 계신, 좀
고약한 노인네였다. 그러나 당신의 평생이 사욕 없이 민족을 위
해 사신 높은 기절을 보이신 표본이기에 뭐라고 대들 수도 없는
좀 밉살스런 노인네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노인네, 학 같은 모습으로 늙어 가시던 노인네는
자신이 소장하던 보물 몇점과 자신이 사시던 집을 처분한 뒤 모
든 것을 출연하여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하시더니, "이제 내놓
을 것은 다내놨어" 하듯이 세상을 뜨셔버렸다.

제자 가운데서 버릇없이 굴기로는 일등이던 이 '성군'이, 그
렇게 갑자기 가버리신데 대한 투정으로 당신을 '노인네, 노인네…'
하면서 눈가에 젖어드는 슬픔을 애써 참고 있는 것을 보시면 이
노인네는 분명히 "못난 놈"이라며 웃고 계실 게 틀림없다.

< 성태용/한학자 양성 장학생 1기. 건국대 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