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3월4일 20세기 최고 정치가의 한 사람 루즈벨트 대통령
이 취임하던 날 워싱턴의 하늘에는 무겁게 어두운 구름이 깔려 있었
다. 그것은 미국이 최악의 공황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루즈벨트
는 대통령 선거를 끝내자마자 과감하게 일련의 뉴딜정책을 펴나갔
다. 한 신문기자가 루즈벨트에게 물었다.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아니요"라고 루즈벨트가 대답했다. "그러면 당신은 자본가입니까?"
"아니요." "그러면 사회주의자입니까?" "아니요." "그럼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무엇입니까?" "철학이라니. 그렇지 나는 기독교신자이며
그리고 민주주의자라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오." .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뉴욕 하이드파크 자택 현관에서 그 유

명한 미소를 가득 지은채 손을 흔들었다. 불꽃에 반사되어 코안경이

붉게 번쩍였다.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치른 날 밤이었다. 저녁

내내 진행된 개표 결과 루즈벨트의 재선이 뚜렷해지자 민주당원들이

재향군인회 악대를 앞세우고 환호성을 울리며 몰려왔던 것이다.

미국 투표사상 최대의 득표차였다. 메인주와 버몬트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승리, 531표의 선거인단가운데 523표를 얻었다. 지금도
미국인들은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캔자스주지사 알프레드 랜던 앞에
'불운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1933년 3월4일 제32대 대통령 루즈벨트가 처음 백악관에 들어갔
을때 미국은 남북전쟁 이래 최악의 위기인 대공황에 직면하고 있었
다. 매일 수천명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고, 은행 80%가 더 심한 금
융공황을 막기 위해 문을 닫았다. 절망과 두려움, 두 단어가 국민들
을 휩싸고 있었다.

33년부터 36년까지 4년동안 루즈벨트가 무엇을 했길래 압도적으
로 재선된 것일까. "우리가 두려워할 유일한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
입니다." 취임사에서 행한 일성이었다.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
는 광범위한 행정권을 요구한 루즈벨트는 출범 100일동안 미국 역사
상 가장 많은 혁신적 법규를 만들었다.

취임 이튿날 첫 조치는 나흘간 은행휴업이었다. 재무상태가 취
약한 은행 200여개를 없애고, 예금은 새로 발족한 연방예금보증공사
에서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금융 신뢰가 회복됐고, 사장되어 있었던
10억달러 이상이 경제로 흘러 들어 왔다. 이어 농업조정국(AAA), 국
가부흥국(NRA)을 신설했다.

생산 과잉으로 빚어진 대공황이었다. 농업조정국은 농부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600만마리의 돼지를 도살케하고, 면화경작지를 1천
만 에이커 이하로 줄이도록 했다. 국가부흥국은 가격을 통제할수 있
도록 반트러스트법 적용을 면제해주고 최저임금제를 보장했다. 34년
봄이 되자 경제는 최악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뉴딜계획'은 희
망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35년 4월 루즈벨트는 공공사업국(WPA)를 설치해 건설사업을 펼
쳤다. 일자리를 만들어 유효 수요을 창출하려는 시도였다. 110억 달
러의 자금으로 미술가, 문필가에서부터 벽돌공에 이르기까지 850만
명을 공익사업에 투입했다.43년까지 교량 7만8000개, 공공건물 12만
5000동을 지었다.

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이 강해지고 기업규제가 심해지가 기업인
들을 중심으로 기업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정부의 주임무는 세출
을 세입 범위 내로 억제시키는 것"이라는 고전경제학에 입각해 궁핍
한 국민들에 직접 지원을 억제했던 허버트 후버 전임 대통령에 비하
면 혁명적 조치였기 때문이다.

루즈벨트는 가난에 찌든 사람들 모습을 찍은 '뉴딜 사진'과 라디
오를 통해 국민을 자기 편으로 이끌었다.

'뉴딜'은 그러나 공황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38년에도 실업자
는 여전히 1000만명에 달했다. 뉴딜은 일관성도 없었고 효율성에도
의문을 남겼다.

하지만 자본주의 그 자체를 구했고, 다른 나라들이 전체주의로
돌아설 때 미국을 자유국가로 지켜주었던 '확실한 지렛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