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책다운 책' '좋은 책' 한 번 만들어 보자고 뭉쳤습니다."
중학생 시절부터 우정을 이어온 북디자이너, 화가, 소설가가 35년이
지난시점에 소년 시절의 꿈을 모아 한 권의 책을 공동으로 펴냈다. 소
설가 이윤기씨가 글을 쓰고, 북디자이너와 화가로 활동하는 정병규-재
규 형제가 디자인과 삽화를 맡은 '어른의 학교'(민음사)다. 알려진 대
로 이씨는 '장미의이름' 등의 번역서와 동인문학상 수상작 '숨은그림찾
기Ⅰ' 등으로, 서울대 회화과를 나와 현재 파리에서 활동하는 정재규씨
는 회화와 사진작업으로, 정병규씨는 한수산의 '부초' 등 수많은 책을
디자인한 우리나라 제1세대 북디자이너로 뚜렷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의 인연은 지난 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북중 3학년

이던 이씨와 정재규씨는 교지 '경우'를, 3년 위의 정병규씨는 역시 경

북고 교지 '경맥'을 만들면서 자연스레 어울렸다. 그러나 '우리 나중에

모여 책 한 번 함께 내자'는 식의 낭만적 약속은 없었다. 이씨는 농대,

정재규씨는 영문학, 정병규씨는 공과대학을 지망하며 책과는 멀어질 줄

알았기 때문. 그러나 '팔자는 끌로 파도 안 파진다'는 이씨의 말처럼

결국은 35년전 교지를 함께 만들 때처럼 한 권의 책을 공동으로 만들게

됐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책은 1류들의 공동작업답다. '언어의 고수'로
불리는 이씨는 모두 32꼭지의 에세이에서 나이 쉰을 넘겨 바라보는 인
생과 세상 이야기를 편안하게 풀어놓는다. '절름발이 역을 맡게 되어
다리 저는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고 종로에 갔더니 종로
바닥이 다리 저는 사람 천지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막상 연극이
끝나고 다리 저는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없게 되니 종로에 나가도 다리
저는 사람이 안 보이더라'는 배우 김명곤의 경험에서 이씨는 '깨어있는
정신'의 중요함을 배운다. 또 6·25 때 참전한 중공군의 손녀와 자신의
딸이 미국의 초등학교에서만나 단짝이 되는 것을 보면서 과거의 미움이
현재의 사랑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배운다. 이씨는 알맞은 교양과 적당
한 유머-수사로 어른이 돼배우는, 세상이라는 '학교'를 맛깔스럽게 그
려낸다.

화가 정재규씨에겐 글 내용은 안보여주고, 각 꼭지의 제목만으로 40
여컷을 그리게 했다. 때론 사군자같고, 때론 춤추는 사람같은 추상회화
들은 그렇게 나왔다. 셋 중 가장 고민한 사람은 정병규씨. 그는 표지
제목'어른의학교' 글자체를 한글 추사체로 뽑아내고, 본문의 배열도 가
장 편안하게 읽히게 디자인하느라 글과 그림이 완성된 후 꼬박 3년동안
이 책을 매만졌다. 이때문에 셋은 책 인세도 3등분 하기로 했다.

"요즘 저녁이면 거실 소파에 '어른의 학교'를 올려놓고 맞은 편에
앉아 그림 명화 감상하듯 책 디자인을 감상한다"는 이씨는 "각자가 시
를 한 편씩 쓴다는 기분으로 만들었으니 한 권짜리 책이면서 시 세 편
이기도 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