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유치원
생들의 바램만이 아니다. 그래서 교수들도 텔레비전에 나와 인터뷰어,
사회자, 토론자가 되고, 심지어 개그맨이 된다. 나는 방송에서 단편적
지식으로 대중을 현혹하거나 자신들의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서 전문가
인 척하면서 대중을 기만하는 그들을 '텔레페서'라고 비난한 적이 있
다.
당대 최고의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위와는 다른 맥락
에서 텔레비전에 나타났다. 그는 TV강의를 담은 '텔레비전에 대하여'
(동문선간)에서 텔레비전의 보이지 않는 메카니즘을 폭로하며 학자 언
론인등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가 저널리즘의 세계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이유는 저널리즘이 지
식인과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민주주의 발전을 심각하게 위협하
고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정치 논리와 경제 논리에 종속
되는 그 자신의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다. 특히 텔레비전은 정보의 독
점, 왜곡, 조종을 통하여 대중 선동적이거나 탈정치적인 메시지를 전
달하면서 민주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상징적 폭력의 기제가 됐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폭력 기제의 사용에 있어서 기자, 학자, 지식인
들이 전위적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패스트푸드와 같은 지식을 갖고
스튜디오에자주 나타나는 '패스트 싱커' 지식인, 사회비판의식을 결여
한 채 지배질서의 통념만을 전달하는 기능적 지식인들이 그 전형이
다. 사실상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조차 출연자들의 구성이나 진행방
식을 보면 무늬만 민주적인,가짜 토론이다.
한편 부르디외는 사실 왜곡의 동질화, 획일화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지상주의를 시장 논리 지배의 정당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세계
화 운운하는 신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신자유주의 비판
의 최전방에 서서 전세계 비판적 지식인의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그
리고 근래에 그는 상아탑에만 안주하지 않고 거리에 나가 실업자, 파
업노동자들의 편에 서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판적 지식인의 또 다른 모습은 '촘스키, 끝없는 도전'(그린비간)
에서 볼 수 있다. 이 시대 최고의 미국 언어학자 촘스키는 인권유린과
세계분쟁에 있어서 지식인과 국가의 야합을 비판한다. 그는 반정부적
정적으로 몰려한때 수감되기도 했지만 정파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은
비판의 목소리를 낸 용기있는 지식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지식인은 어떠한가. 소신있게 정치적 발언을
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있는가? 얼마전 정치판에서 쫓겨난 학자, 자
장면 배달원 같은 신지식인 상에 밀리는 구지식인들(?), 모두 별말이
없다. 유럽의지성 부르디외와 미국의 촘스키 같은 비판적 지식인의 상
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는 우리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구지식인상일까? ( 고려대 교수·사회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