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리-사이비신자 수탈-폭력 일삼아 민원폭발…700명 희생 ##.
30여년전 제주도에 가서 이순옥이라는 할머니를 찾아 이 고을 저
마을을 헤맨 적이 있다. 일제때 나온 소책자 '야월 한나산'의 저자
라는 것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요 생사도 모르지만 제주도에 살아있
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서 찾아 헤맸던 것이다. 이 책은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성교란의 견문을 모은 것으로, 할머니는 바로 성
교란의 주모자 이재수의 누이동생이다. 이 동회 저 면사무소를 찾아
다니다가 바다가 내다 보이는 서귀포 665번지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할머니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당시 나이 73세로 아명인 오돌또기 할
매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오돌또기는 할미꽃의 제주 방언이다.
천주교도 700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성교란이 진압되고 주모자
이재수가 서울에 붙들려가 처형되자 오돌또기는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어 문전 걸식을해야 했다. 대역죄인의 피붙이인지라 밥을 주면 후
환이 있을까 싶어 내쫓거나 달래 보내는 바람에 무척 굶기도 했다.
그는 오빠의 누명을 벗기는 일이 자기가 살 길이라고 작심하고
직접 보고들은 성교란 이야기를 꼬박꼬박 글로 적어 모았다. 그리고
15세되던 해 도둑 기차-공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갔다. 당시 소문
난 작가들을 찾아다니며 책자로 내고자 도움을 청했는데, 그 정성에
감동한 작가 12명이 추렴하여 낸 책자가 '야월 한나산'이다. 그리고
돌아온 오돌또기는 결혼하지 않고예수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 "정
녕 오빠는 하나님의 사자이십니다. 하나님을 팔아 하나님을 모독하
는 이들을 꾸중하러 보내신 겁니다. 오빠는 하나님 편입니다"고 하
던 말이 생각난다.
당시 제주도의 세금은 궁중 살림을 도맡은 내장원이 직접 관장하
여 제주 목사도 간여할 수 없었기로 권세를 남용, 횡포와 수탈이 극
에 다다랐다. 그 봉세관인 강봉헌은 어민이 잡아 제 밥상에 올리는
고기나 전복에까지 어세를 물리고 집안에 큰 나무가 있으면 수세라
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갔다.
이 강봉헌의 세금 수탈에 사이비 천주교도들이 편승한 것이다.뿐
만 아니라 조정에서 프랑스 신부들을 극진히 대하라는 지시도 있곤
해서 제주 아전들이 천주교에 들어 보신하는 풍조까지 있었으니 관-
교가 유착했고 더욱이 제주에 유배당한 죄인들이 천주교에 들어가
신앙과는 아랑곳없는 분풀이를 일삼았으니 민원이 상승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이 성교란에 대해 특집을 했던 영문 잡지 '코리아 리뷰'에
당시 주민들이 천주교에 입신한 신앙 외적 동기를 조사, 이렇게 적
고 있다. ▶약과설탕을 얻을 수 있다 ▶관리와 동등한 권한을 행사
할 수 있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죄를 짓더라도 성당에 들
어가면 못잡아간다 등등. 신앙과 아랑곳없는 이 사이비 교도들의 월
권 행위가 서민들과 갈등을 심화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섬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의지해온 당산목이나 신당을 파괴하고
다니는가 하면 성당 분소마다 형틀을 마련, 동조하지 않으면 잡아다
고문을 가하기까지 했다 한다. 신평리에 사는 송희수라는 사람은 그
월권행위를 비난했다 하여 10여명이 와 잡아다가 상투머리를 풀어
성당의 분소장이 타고 다니는 말꼬리에 붙들어 매고 5리길이 되는
대정읍내까지 끌고 간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천주교를 반대한다 하여 사이비 교도 오달현 등 다수가 유생 현
유순의 집을 습격, 세간을 부수고 현을 성당으로 끌고 가 상비해둔
형구로 고문을 하다 치사케한 사건이 벌어졌다. 제주 관가에서 나와
치사를 확인하고 검시까지 했으나 살인범을 구금하기는 커녕 수사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이때 검시관이 대정현감인 채구석이요 그검시
를 위해 하수인으로 수행한 것이 대정현의 관노이던 25세 청년 이재
수였다.
잇따른 불법에서 자구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좌수인 오대현이
주동해 상민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성토대회를 열었으며 그 여세를
몰아 제주목사에게 등장가기로 하고 출발했다. 등장이란 백성 여럿
이 연서명하여 요로에 호소하는 민원통달 방식이다. 그 일행 가운데
는 이재수도 끼여있었다. 이를 사전에 탐지한 교도 쪽에서는 양총
조총으로 무장출동, 제주와 대정의 중간 지점인 명월진에서 마주쳤
다. 이 충돌로 등장꾼 한 사람이 총상을 입었고 오기현 등 6명이 제
주 주성에 납치되어 감금당했다.
이에 이재수는 대정으로 돌아와 사발통문을 돌려 주성에 감금된
등장의 장두 오기현과 동지들을 구출하고 제주 목사에게 봉세관과
교도의 월권을 다스려줄 것을 호소하자고 했다. 의외로 여럿이 호응,
동서두패로 갈라 제주섬을 한 바퀴 돌며 장정을 모아 제주성에서 합
류키로 했다. 교도들은 성안으로 들어가 무기고의 무기를 꺼내 성문
을 닫고 대치했으며 주민들도 산포수들을 앞세워 총격전을 벌여 사
상자가 나기 시작했다.
성문 폐쇄로 식량이 떨어지고 생업이 중단되자 성안 부녀자들이
봉기, 그여세를 몰아 하강상 부인 고오적 부인 등이 주도한 부인부
대가 성문 빗장을 열었다. 이재수의 지휘로 입성하면서 포박한 교도
250명을 관덕정 앞뜰에 모아놓고 살육하기 시작했다. 이때 천주경이
나 십계명을 외우며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죽어간 진실한 교도
도 적지않았다 한다. 이어 섬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교도들을 수색,
살육하여 희생자가 700명에 이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난 수습차 프랑스 군함을 타고 사건 열흘뒤 현장에 도착한 미
국인 외부 고문 샌즈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제주 목사가
거처하는 관사 대문 앞에서는 시체 99구를 헤아릴 수 있었다. 남녀
노소가 뒤엉킨 그 시체들은 하나같이 참혹하게 난도질당한채 열흘째
버려져 있었다'. 샌즈는 그 목사가 거처하는 집 정원 근처 방 하나
에 기거했는데 새가 그 정원에 시신이나 해골 조각을 물어다 떨어뜨
리곤 했다고 적고 있다.
민란 수습을 책임진 찰리사가 제주성에 들었을 때만 해도 동서
민군 1만명이 성을 지키고 있었으며 민원을 사게한 봉세관 강봉헌과
군기탈취를 선도한 유배죄인 이용호 등을 구속하여 민심을 가라앉히
고 신임 제주 목사가 세 수탈과 교인들의 작폐를 다스리겠다고 공약
함으로써 민군을 해산시켰고 이재수 오대현 등 주모자는 순순이 체
포에 응해 서울로 압송당했다.
처형당한 주모자 이재수의 그늘에 일적화라는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음을 오돌또기 할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성교란 이전에 대정
관헌에 관기로 있던 일적화는 이재수와 천한 신세를 토로하며 서로
의지하고 철부지들의 애정 표시인 새끼손가락질까지 한 사이다.
그 일적화를 우연히 만난 홀몸의 오돌또기는 퇴기가 되어 혼자
살고있는 일적화와 같이 살기로 했다. 외딴 둔덕 아래 움막을 짓고
밭을 일궈 살아오면서 대정골에 오빠의 행적을 후세에 남기는 비석
을 세우기로 하고 모금 동냥 행각에 나선 것이다. 방에서 자는 날보
다 노숙하는 날이 많았고 성교란에 죽음을 당한 후손들을 만나 시궁
창물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 모진 일들을 속죄로 감수하고 2년동안
빌고다녔다. 들판에서 잠잘때 베고 잤다는 베개라면서 꺼내 보이는
것은 누덕누덕 해진 성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일적화가 몸져 눕더니 정방산 양지바른 곳에 표지
를 해놓았다며 그곳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 새끼손가락
사랑으로 평생 혼자 살다가 죽어서도 홀로 적적하게 피어있을 일적
화는 한 가락 비가다. 오돌또기는 동냥을 계속하여 1961년대정 네거
리에 오빠 이재수의 비를 세워놓고 만다. 이재수가 처형당해 묻힌
서울 남대문밖 청파동의 죄인 묘지는 일제때 파헤쳐 일본인 고급 주
택이 들어서는 바람에 찾을 길 없어 이재수의 유일한 연고물로 지금
그곳에 서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