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입 1년 지났어도 외면 여전…자기 사람 심기에만 급급 ##.
♧ 지난 해 초 한 제지회사의 사외이사로 선임됐던 연세대 김
모 교수는 이사 선임 후 어느 날 신문을 보다 아연실색하고 말았
다. '○○제지 공장 매각'이란 제목으로 자신이 사외이사로 있던
회사 관련 기사가 실렸던 것. 그는 당장 회사로 전화를 걸어 "이
사가 모르는 공장 매각이 있을 수 있느냐"며 따졌지만 "이사라고
다 같은 이사냐.사외이사니까 회사일에 끼여들지 말아달라"는 충
고만 들어야 했다.
공장 매각 결정같은 중요한 이사회 의결사항도 알려주지 않
으니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김교수는 "이사는 회사 내부 자
료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지만 재임 6개월간 단 한차례도 그런 권
리를 누려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참다 못한 김 교수가 사표를 내자 회사가 난감해졌다. 회사
는 "거마비를 올려 드릴테니 제발 나가지는 말아달라"며 매달렸
다. 따돌리기는 할 망정 회사들은 사외이사를 내칠 수 없기 때문
이다. 그랬다가는 주식 관리종목으로 지정되고, 사외이사 없이 2
년간 버티면 상장폐지를 당하고 만다. 회사 입장은 요컨데 "어쩔
수 없이 선임하니 알아서 조용히 있어달라"는 것이다.
사외이사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 1년. 그러나 사외이
사제는 당초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휘청대고 있다.
우리 나라에 사외이사제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IMF 직후인 지난 해 초. 정부는 IMF 체제에 들어선 직후 비상경
제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 ▲오너 대
주주로부터 독립되고 실질적인 의결권을 갖는 이사회 구성 등을
위해 사외이사제를 도입키로 결정했다. 또 갑작스런 사외이사제
도입에 따른 충격을 줄이기 위해 98년 1년간은 한시적으로 회사
당 사외이사 수를 1명 이상으로 하되, 99년부터는 등기이사의 25%
를 사외이사로 채울 것을 의무화했다. 대책위는 이와 함께 '사외
이사를 선임하지 않으면 관리 종목으로 지정하고 2년간의 유예기
간을 거쳐 상장을 폐지한다'는 제재 조치까지 만들었다.
정부의 강경 방침에 따라 모든 상장사들이 사외이사를 선임
하고 나섰지만 기업들은 마지 못해 호응하는 양상이다. '외부인
에 의한 경영권 침해'라는 기업들의 부정적 시각도 여전하다. 올
들어서는 사외이사 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다양한 작전을 펴고 있
다.
사외이사를 둬야 하는 상장사들은 지난 2∼3월 주총에서 정
관 개정을 통해 집중투표제 배제, 등기이사 축소 등의 방법을 동
원해가며 사외이사들의 힘을 무력화하는 '제도적 방안'을 마련했
다.
소액주주들과의 싸움으로 관심을 끌었던 삼성전자의 주총도
마찬가지. 지난 3월 20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주총에서 사외이
사 선임을 요구하는 참여연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삼성측의 방해
작전으로 주총은 무려 6시간 이상 이어지며 진통을 겪었다.
참여연대 장하성 교수(고려대)는 회사측이 2명의 사외이사를
추천하고 표결에 들어가려 하자 "삼성이 우리에게 사외이사를 추
천하라고 했던 당초 약속을 깨뜨렸다"며 투표 참여를 거부했다.
삼성이 내놓은 사외이사추천위원회 구성안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삼성은 주식 5% 이하 주주 가운데 주식 보유순으로 10명을
뽑아 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정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장 교수는 "주식보유 비중이 0.05%에 불과한 참여연대의 힘을 무
력화해 사외이사 추천을 막으려는 조치"라며 "올해부터 추천위원
회를 가동한다고 하지만 이사 임기가 3년인 점으로 볼 때 위원회
는 앞으로 2년간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외이사가 전체 등기이사의 25% 이상 돼야 한다는 상장 요
건을 채우기 위해 거꾸로 기존이사를 사임케 하는 상장사도 나오
고 있다. 대한상의와 상장사협의회 관계자들은 "상당수 회사들이
등기이사수를 대폭 줄였다"며 "껄끄러운 사외이사를 줄이기 위해
전체 이사수는 그대로 둔 채 등기이사만 줄인 곳이 많다"고 지적
했다.
회사가 부실에 빠질 경우 사외이사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지
만 이사라고 다같은 이사가 아니다.
서울의 한 제약회사에서 사외이사로 재직하다 지난 3월 퇴임
한 변호사 C씨는 1년간 단 두번, 선임 때와 해임 때 주총에 가본
것 외에는 회사 근처에 가보지도 못했다. 그는 "이사로 선임된후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에 자비로 사외이사 교육 프
로그램에 참여해 교육도 받았지만 이사회 참석 통보를 한번도 받
아본 일이 없다"고 허탈해 했다.
부실 경영에 따른 책임도 사외이사를 외면하게 하는 요인이
다. 기계 제조업체 K사 사외이사를 그만둔 서울 모 대학 산업공
학과의 윤모 교수는 "배상보험에 가입시켜 달라고 요구했더니 못
해준다고 하더라"며 어이없어 했다. 그는 "결정은 자기들이 다
해버리고 책임은 함께 지자면 사외이사로 일할 사람이 누가 있겠
느냐"며 "들어가 보니 할 일은 없고 위험 부담만 높아 그만뒀다"
고 말했다. 게다가 사외이사 선임 결정권이 대부분 오너 대주주
들에게 있기 때문에 사외이사들은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기 힘든
실정이다. 윤 교수는 "사외이사에게 대주주를 감시하고 소수 의
견을 내라면서도 선임권을 오너들에게 주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
적했다.
사외이사를 오너 입맛대로 고르는 것은 사외이사 양성 기관
의 배출 실적에서도 드러난다. 경영자총연합회, 상장사협의회,대
한상의 등은 사외이사 수요증가에 대비, 지난해부터 수천명의 사
외이사 후보들을 양성했지만 이들 기관을 통해 사외이사가 된 사
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경총은 2000여명의 인력풀에서 3월 말까지 단 한 명의 사외
이사도 배출하지 못했다. 대한상의는 4기에 걸쳐 사외이사 후보
500여명을 양성했지만 SK에 한 명만이 들어갔을 뿐이다. 가장 실
적이 좋다는 상장사협의회도 473명중 20명 정도만이 사외이사 입
성에 성공했다.
사외이사에 참여하려는 희망자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경총과
대한상의등 사외이사 배출기관에서 양성된 후보들 중에는 주주이
익 보호나 경영 감시보다는 퇴직 후 소일거리나 경력관리를 위해
사외이사직을 희망하는 사례가 많다.
사외이사 교육 수료자 모임인 사외이사발전위원회 한 회원은
"오너들의 낙점만 바라고 있는 실정인데 감시나 비판을 할 수 있
겠느냐"며 "삼성전자 주총에도 사외이사를 희망하는 사람들 사이
에 치열한 로비전이 벌어졌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처럼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외이사제를 제대로 정착
시키기 위해서는 사외 이사 추천의 일정부분은 오너를 제외한 제
3자에게 맡겨 선임의 독립성을 확보하고,기업들이 사외이사에 대
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3월 참여연대 추천으로 SK 텔레콤 사외이사에 선임된
고려대 남상구 교수는 "사외이사 활동을 통해 계열사간 자금 지
원을막고 부당한 지원금 3000억원을 회수했다"며 "사외이사도 회
사를 위해 일하지만 소신있게 일하려면 선임 과정의 독립성을 보
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
증권거래소 상장사 193곳 설문조사
사외이사 절반, "의사 결정 반대한 적 없다"
--------------------------------------------
지난 2월 증권거래소가 193개 상장사와 사외이사 177명을 대
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나라 기업들이 사외이
사를 얼마나 냉대하는지 엿볼 수 있다.
조사 결과 사외이사의 36.7%가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기업으
로부터 이사회 활동과 관련된 정보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하고 있
었으며, 사외이사의 54.7%는 한번도 기업의 주요 경영 정책에 반
대 의견을 개진한 일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의 경영 투명성 제고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도 "기여했다"는 응답(21.1%)보다는 "미흡하다"(28.1%)가 더 많
았다. 또한 반대의견 개진시 최종 의사결정에 의견이 제대로 반
영되는 지 여부에 대해 사외이사 31.3%만이 "충분히 반영됐다"고
답했다.이사회 참석률도 저조해 이사회중 절반 이하로 참석한 경
우가 전체의 30.6%나 됐다. 사외이사의 추천은 대주주와 회사 임
원이 각각 55.4%와 41.7%나 된데 비해 소액주주가 추천한 경우는
단 두 건으로 전체의 0.1%에 불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