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면…, 다시는 헛된 꿈을 꾸지 않을 겁니다."
방글라데시인 암자드 투툴(26)씨. 변호사를 꿈꾸던 법학도에서
노동자로 변신한 지 1년6개월째. 두 여동생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해 97년 10월 대학을 자퇴하고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오기 위해 빚을 내 마련한 700만원의 [입국비용(현지 근로자
5년치 연봉)]을 브로커에게 건네야 했다.
첫 직장은 의정부의 한 가죽가공 공장. 불운하게도 5주일 만에
오른손 중지가 가죽 압착기에 빨려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실직상태로 맞은 IMF사태. 사글세방에서 월 10만원으로 5개월을
버텼지만, 어렵사리 구한 두번째(세탁소), 세번째
직장(방적공장)에서도 체불은 계속됐다. 네번째 일터인 동두천의
옷공장에선 싸움을 말리다 쇠파이프에 맞아 왼쪽 팔꿈치뼈가
으스러졌다. 철심을 박는 수술까지 받았지만 보상금 한푼도
못받은 채 쫓겨나야 했다. 오갈 데 없게 된 그는 작년 12월
성남외국인노동자의 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한국인은 약자에게 잔인한 사람들"이라며 "잘못된 선택치고는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고 했다.
95년 한국에 온 필리핀 여성 니키(26)씨. 작년 8월 경기도
화성군의 한 프레스공장에서 두 손가락을 잃었다.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 [자동]을 [반자동]으로 조작해 놓은 프레스 기계에
당했다. 사장의 약속만 믿고 보상금을 기다리다 올 초 회사는
부도가 났고, 사장은 행방불명. 체불임금 대신 공장을 인수한
근로자들조차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는 데서는
더이상 할 말을 잊었다.
95년 겨울 한국에 온 나이지리아인 아비드(30·가명)씨. 같이 온
동료들이 공항에서 추방당하는 장면을 숨죽인 채 곁눈질할 때만
해도 [난 행운아]라고 생각했지만 [환상]은 곧 깨졌다. 되풀이된
체불과 전직(전직). 작년 2월 이후엔 줄곧 실직상태였다.
월세마저 감당키 어려워 반평짜리 방에 룸메이트를 5명까지
늘렸지만, 돈은 곧 바닥났다. 출입국사무소 상담실을 찾기도
했지만, "벌금을 안내면 보내줄 수 없다"며 퇴짜를 맞았다.
그래도 한가닥 행운이 남았던 걸까. 피난처로 삼은 대한성공회
[샬롬의 집] 사람들의 도움으로 귀국행 항공권을
구할 수 있었다.
그를 도운 이정호 신부는 회원 소식지를 통해 귀국을
앞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 더이상 한국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희망과 꿈의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 네가 젊음을
담보로 이 나라에서 꿈을 이룬다는 것은 거의 무망한
일이다.…다시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지 마라."
하지만 작년말 IMF 이후 한동안 줄어들던 [코리안 드림]의 행렬<
표 >은 올들어 다시 10만명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