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 4주째 접어드는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은 2차대전
과달카날섬 전투를 다룹니다. 이 영화에선 치열한 전투신 사이사이 몰
입을 방해하는 장면이나 내레이션이 수시로 끼어들지요. 병사들이 숨이
턱에 차도록 진격하는 와중에도 불안과 광기, 환멸과 죄의식에 사로잡
힌 독백이 이어집니다. 느닷없이 밀림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을 잡기도
하고, 벌레 먹은 나뭇잎에서 늪속 악어까지 비춥니다.

이 쓸모 없어 보이는 것들은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씬
레드 라인'은, 이를테면, 쉼표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니까요.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는 쉼표가 얼마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지 잘 말해줍니다. 편지 형식을 빈 이 소설은 쉼표로 미세한 감정 결
을 살려냅니다. 일례로, '당신, 저를, 용서하세요'라는 문장에서 쉼표
는 '저를 용서하세요'가 품을 수 없는 것들을 담지요. 꾹꾹 눌러 삼킨
뒤 견디다 못해 조금 내뱉는 자의 떨림같은 게 쉼표마다 담겨 있거든
요.

이인성 '한없이 낮은 숨결'은 좀 더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요. 처음
부터 끝까지 쉼표와 말줄임표, 분절된 단어로만 짜여 있습니다. 구두
점 하나 없이 헉헉거리며 주저하는 이 소설에서 쉼표는 결정적 구실을
합니다.

쉼표는 단어와 문장 사이 생략된 숱한 의미를 품는 비밀의 샘입니
다. 적극적 독자 해석을 불러들이는 주문같은 것이지요. 쉼표는 결국
창작자보다는 소비자를 위한 '겸손한' 부호라 할 수 있습니다. 화자와
필자는 단어 조합으로 의미를 파생시키지만, 청자와 독자는 띄어읽기
나 띄어쓰기, 쉼표를 통해 그 의미를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결국 '씬 레드 라인'은 쉼표를 찍고 여백을 만듦으로써 역사의 미
친 질주에 브레이크를 거는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쉼표에
접할때마다 관객은 전쟁 참상에서 눈돌려 삶과 역사를 정리하게 됩니
다. 던져준 것만 받아들이며 따라가기 쉬운 대다수 영화와 달리, '씬
레드 라인'은 여백과 침묵 너머를 응시하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
입니다.

아이들은 잠자는 동안 키가 큰다는 말이 있지요. 삶이 성장하는 것
은 열변과 고함의 순간이 아닙니다. 의미를 안으로 곰삭이는, 침묵과
여백의 시간들이지요. 삶이라는 문장은 현란한 단어 배열이나 오만한
구두점만으론 완성될 수 없겠지요.

( 이동진기자 dj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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