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아름다운 빛이 스며들던 화랑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 건
드리며 내게 하는 말이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요? 돌아보았을
때, 내 어깨를 툭 건드렸던 손길 같은 것은 없었다. 보이는 것은 은은
하게 스며드는 햇살, 그리고 거대한 창문.'.
소설가 김인숙(36)씨가 내주초 펴낼 신작 장편소설 '꽃의 기억'(문
학동네) 도입부다. 빛과 속삭이면서 문을 연 이 소설은 주인공 '나'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어둠 속 환영으로부터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
지요?'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끝난다. 화랑 큐레이터인 30대 이혼녀 '나'
가 열흘 동안 겪는 '그 무슨 일'이 이 소설의 기둥줄거리다. 변호사와
결혼해서 딸까지 낳았던 '나'는 장차 화랑을 운영하리라는 희망을 품은
여성이었지만, 환락가 여자들과 변태적 성행위를 일삼는 남편의 실체를
깨닫곤 이혼한 뒤 혼자 아이를 키운다. '나'는 이혼 이후 여러 남자를
만나다가 기행을 일삼는 화가와 부유한 의사 둘 사이를 오간다. 여기까
지 보면 이 소설은 가부장제의 성적 제약에서 벗어난 젊은 이혼녀의 해
방 선언같다.
하지만 빛의 환청, 어둠의 환영이 처음과 끝에서 반지처럼 이어지는
기묘한 구성을 취한 소설답게 환각같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신지
우'라는 이름의 낯선 사내가 '나'와 처음으로 술자리에서 만난 뒤 '나'
의 아파트에 열흘 동안 머물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나'는 여러 구멍들 속에서 튀어나오는 오락실 두더쥐 인형들이 머리
속에 가득한 것처럼 혼란스럽다고 중얼거린다. '나'는 정숙하고 착한
여자이기도 하고, 성욕에 굶주린 요부이기도 하고, 정신적 사랑을 갈구
하는가 하면, 물질적 욕망을 그 사랑과 교환하고 싶기도 하다. 그런
'나'의 양면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 '신지우'라는 수
수께끼 사내를 통해표현 된다. 그들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가.
결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욕
망과 위선이 지배적인 현실 속의 '나'를 통해 여성적 삶의 정체성 찾기
라는 주제를 흥미있게 형상화한다. "어쩐지 속옷 한 자락을 보인 기분
이다"라는 당선 소감과 함께 나이 스무살에 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신선한 충격을 던졌던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도 여전히 푸르른 날
의 감성적 문체를 발휘한다. 작가는 "하이텔 통신에 연재했던 이 소설
을 지난 1년6개월 동안 거의 새로 쓰는데 매달렸다"라며"글이 고쳐지는
것처럼, 익숙했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기도 했고 새로운 사람들이 내
곁에 머물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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