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산업은 그 자체가 서부극이었다. 영화 제작자들은 뉴욕이나
시카고를 버리고 무인 사막지대와 다름없는 서부의 헐리우드를 개척
했다.인건비나 촬영의 기후 조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영시간을 10
분으로 제한하는 등 에디슨을 비롯한 특허회사들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 피난처에서 탄생한 것이 허름한 곡물창고를 사
들여 촬영소를 만든 세실 B 데밀의 서부극 '스쿼 맨'이었으며 3시간
짜리 대작영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었다. 그것은 바로 '헐리
우드영화의 탄생'이기도 했다. (이어녕·이화여대 석학교수).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지금의 헐리우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태평양
연안 햇빛 도시의 영화 촬영장, 릴라이언스 머제스틱 스튜디오. 삼각
두건 복면을 쓴 쿠 쿨럭스 클랜(KKK) 일당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 달
리는 장면이 한창 촬영 중이었다.

세계 영화 사상 최초의 대작 영화로 기록될 '국가의 탄생 (A Birth
of a Nation)'은 이렇게 미국 서부에서 태어났다. 감독 데이빗 W 그리
피스는 당초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던 중견 감독이었지만, 당시로선 대
단한 제작비 10만 달러를 쏟아부은 이 영화를 찍으러 캘리포니아로 달
려왔다. 친구 빚까지 끌어다 겨우 막은 제작비는 그러나 개봉후 미 전
역에서 2천만달러 수입을 기록하며 영화 산업이 숨은 노다지임을 확인
했다. 전투 장면에는 5백명이넘는 엑스트라가 출연했고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위해 10m가 넘는 촬영탑을 세웠다. 당대 최고 인기 스타였던
릴리언 기쉬와 후에 영화 감독으로 활약한 라울 월시 같은 쟁쟁한 캐
스팅 역시 이후 헐리우드 제작 방식을 예고한 '흥행 캐스팅'이었다.

1915년 봄 영화가 개봉되자 전국적으로 항의 시위가 줄을 이었다.

상영 시간 3시간의 영화를 관통하는 너무도 명백한 인종주의에 항
의, 미국유색인종 지위향상 협회(NAACP) 수천 회원이 극장마다 시위를
벌였다. 그래도 상영 수입은 척척 올라갔고, 그리피스는 다음해 더 큰
예산을 들여 '인톨러런스(Intolerance)'를 만들 수 있었다. 미국의 남
북 갈등과 링컨 대통령 암살 등 등 굵직한 역사 사건에 간절한 사랑과
헤어짐의 멜로드라머를 담은 이 영화는 이제 영화가 더이상 몇몇을 위
한 예술이 아니라 모험 투자 산업임을 확인시켰다.

영화의 출생지는 유럽이었고 미국에서도 애초 영화는 뉴저지와 뉴
욕, 동부 해안의 세련된 선각자 몫이었다. 그러나 20세기를 압도적으
로 지배할 대중 문화 상품으로 영화가 활짝 꽃 피운 곳은 일년 내내
햇빛 화사한 캘리포니아였다. 반세기전,금과 은을 찾아 서부로 떠났던
미국인들이 이제 또 새로운 황금광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행장을 꾸렸
다.

헐리우드를 세운 것은 동부의 고답적 예술가들이 아니라 영화 배급
을 장악하고 있던 극장주들이었다. 예술의 중압에서 자유로왔던 이들
은 투자와 결실이란 합목적 아래 영화를 만들었다. 논란이 일면 일 수
록 좋았다. 도덕과 예술적 기준보다는 사람을 얼마나 모으느냐가 헐리
우드 선악 기준이 됐다.강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사막에 세운 꿈의 성,
헐리우드에서 살아남았고, 19세기말 유럽이 창조해 낸 기술은 20세기
문화상품으로 미국 서부에서 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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