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렌스 맬릭 감독 '20년만의 작품'…전쟁의 복합적성격 묘사 ##.

♧ 무릇 전쟁영화라면 주인공이 빗발치는 총탄을 무릅쓰고 전우를
구하러 달려가는 장면 하나 쯤은 꼭 나온다. 이때 감독은 둘중 하나
를 택해야 한다.

발을 떼자마자 그 자리에 탄환이 날아와 박히는 식으로 짜릿하게
찍느냐, 조금은 여유 있게 멀찍이 떨어진 곳에 쏟아지는 식으로 가느
냐. 앞의 것은 좀 거짓말 같아 보일 우려가 있고, 뒤의 것으로는 손
에 땀을 쥐게 하는 효과를 보기 힘들다.

테렌스 맬릭이 과달카날 전투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궁금해 한 건 그가 어떤 방식을 취할까 하는 것이었다. '불모지'와
'천국의 나날', 단 두편을 만들어 거장이 돼버린 이 신비의 사나이가
20년만에 돌아올 결심을 했을 때에는 뭔가 대단한 각오가 있었을 테
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씬 레드라인(2월 13일 개봉)'엔 둘다 있다.한
10분동안 남태평양 풍경만 지리하게 스케치해 놓고, 또 10분을 주요
캐릭터 소개, 총소리는 언제 나나 싶게 뜸만 한참 들인다. 드디어 출
동 명령이 떨어지는가 싶지만 숨막히는 긴장을 한껏 조성해 놓고는
막상 작전이 개시되자 뭍에서는 아무 반격도 없고 미군은 무혈 상륙
한다. 맥이 빠진다.

그렇다고 여기 '조마조마'와 '아슬아슬'이 없는 건 아니다. 한번
시작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지는 전투 신
들에는 충분한 장르적 쾌감이 있다. 게다가 대가가 무거운 몸을 움직
이자 스타들이 재빨리 줄을 서는 바람에 작은 역할 하나하나에도 중
후한 얼굴들이 즐비하다.

존 트라볼타 장군 밑에서 출세에 혈안이 된 닉 놀티 대령이 부하
들을 사지로 내몰자 숀 펜은 부하를 구하기 위해 탄막을 헤치며 달리
고 우디 해럴슨은 경황없는 통에 수류탄 핀을 잘못 뽑고 폭사한다.이
런 꼴을 보고도 항명하지 않는다면 엘리어스 코티어스 중대장은 휴머
니스트 주인공으로 자처할 자격이 없으리라. 그가 "자식과도 같은 내
병사들은 죽일 순 없다"고 할때의 가족 의식과, 그가 파면되고 새로
부임한 야심가 조지 클루니가 지껄이는 가족 어쩌고 하는 소리는 그
뉘앙스가 영 다르다.

어쨌든 이 와중에도 벤 채플린은 고무신 돌려 신은 아내의 편지를
읽으며 질질 짜고 존 큐색은 자원 특공대를 이끌고 적 벙커를 공략하
는가 하면, 짐 캐비즐은 신병에게 "여긴 내게 맡기고 넌 가서 위험을
알려라"며 단신으로 적을 유인하다 죽는다.

경건한 이상주의자 캐비즐과 냉소적인 현실주의자 펜의 대비, 무
모한 놀티와 신중한 코티어스의 둘의 연기는 이 영화 최고의 볼거리
다 충돌이라는 틀에 박힌 설정하며, 66년작 소설을 각색한 탓인지 여
느 전쟁영화에서나 익히 보던 광경들로 가득하다. 일본군을 박멸해야
할 해충으로 보지 않고 똑같은 인간으로 묘사했다는 칭찬은 하나마나
다. 하버드대 철학박사 맬릭은 스필버그가 아니며 그에게 이 정도는
기본이니까.

문제는 재료를 요리하는 스타일이다. 우선 복수 주인공 도입이 그
첫번째 특징이다. 여러 인물들이 시퀀스별로 릴레이하듯 주인공 자리
를 차지한다.

전쟁의 복합적인 성격,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는 데 이 처방은 특
효를 보였다.

두번째, 보이스 오버 독백의 전면적인 활용. "사랑과 미움은 하나
의 근원을 가졌다"는 식의 알쏭달쏭한 문장들이 정말이지 지겹도록
이어진다. 이건 영화에 내레이션을 입힌 건지 시 낭송에 배경 그림을
깐 건지 구별이 안될 지경이다.

셋째, 한참 싸우고 있을 때 엉뚱하게 삽입되곤 하는 자연 풍경.집
중 포화가 휩쓸고 지나가자 숭숭 구멍난 나뭇잎의 클로즈업, 졸지에
날벼락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새 새끼, 포복 전진할 때 태연히 앞을
지나는 연둣빛 뱀, 전투 직전 돌격 명령을 기다리며 무심코 건드린
미모사잎새의 움츠림과, 전투 직후 풀잎에 맺힌 핏방울의 영롱함, 앵
무와 박쥐들, 구름이 걷히면서 찬란한 햇빛이 정찰조를 서서히 에워
싸는 롱 쇼트 따위는 천마디 독백보다 강력하게 어필한다. 그것들이
있어서 비로소, '불모지'가 아니라 '비옥한 대지'에서 보낸, '천국의
나날'이기는커녕 '지옥에서의 한 철'이라는 역설이 제대로 살 수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