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로수와 조각처럼 빚어놓은 돌 벤치. 조경이 잘 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앞마당은 결혼 사진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 그러나 이
곳도 여자들 눈에는 불친절하기만 하다. "…돌벤치에 앉았다가 차가움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여자는 서있거나, 아니면 남자 무르팍에나 앉으라
는건지…"(정운례·동국대 대학원).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구조물, '아름답다'는 시설도 여자들이 보면
전혀 다를 수 있다. 아파트 다용도실은 주부나 드나드는 창고에 불과한
가. 가족들 모두 나간 뒤 종일 비어있는 거실은 남향으로 내주고, 주부
일터이자 생활공간인 부엌은 어두컴컴 썰렁한 북향에 처박아 두는 것도
불만스럽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건축을 꿈꾸자'(서울포럼 간)에는 이처럼 여자
'건축소비자'들이 원하는 건축이 담겨있다. 인터넷 토크쇼 '아크포럼'
(www.archforum.com)이 지난해 10월 '여성 건축가'를 주제로 내걸고 벌
였던 토론을 모은 책이다. 건축가 김진애씨가 주도하는 '아크포럼'은 97
년4월부터 2년 가까이 매월 특정 주제를 놓고 격론을 소화해왔다.
남녀 건축가들과 일반 토론자 관심은 역시 주택, 그중에서도 부엌에
몰린다. 건축가 성인수(울산대 건축학부 교수)씨는 "아파트에서 대부분
북향인 부엌과 식당을 남쪽으로 보내야 한다"며 "주택에서 남성 공간은
담배 피울 수 있는 베란다쯤이 아닐까"라고 했다. 김진애씨도 "현대 집
은 남자를 소외시키고 여자가 독점하지만, 그 여자조차 피상화-상업화된
여성이라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실제 소비자 요구는 더 현실적이다. 호주 유학생 김지은씨는 "부엌에
서 진짜 문제가 방향에 있는지, 좁디 좁은 공간 배분에 있는지도 따져보
자" 했고, 건축가 박연심씨는 "창고 구실밖에 못하는 부엌옆 다용도실을
해체하자"고 제안한다. 전업 주부라고 밝힌 익명 토론자는 "부엌을 가족
모두 지나다니는 곳에 배치해, 1주일에 한번이라도 모두 부엌에서 각기
맡은 역할을 하며 사랑이 깊어가게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김진애씨는 집 가운데 부엌을 설치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만든
자기집을 예로 들었다. 김씨는 "손님에게 드러내 보여도 좋을만큼 깨끗
한 부엌, 편한 부엌이어야 주부 혼자 종종걸음 칠 필요도 없고 외롭지도
않은 가족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