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선생님. 나는 지금 당신의 묘소 앞에 서 있습니다. 육신의
싸늘한 소멸 너머 어딘가에 아직도 고여 있을 당신의 정신을 찾아 이
곳에 왔습니다. 물어 물어 이 머나먼 가토(Gataw)의 묘지를 찾아오며
나는 울었습니다.
당신은 왜 선영이 있는 따뜻한 고향 통영에 잠들지 못하고 이토록
춥고 음산한 베를린의 공동묘지에 육신을 뉘어야 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잠든 묘지는 흡사 폐광처럼 쓸쓸합니다. 하늘은 무겁게 가
라앉았고 꽃은 시들었습니다. 방하착! 마지막 나뭇잎 몇이 망명 예술
가의 묘소 위로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쩔수
가 없습니다. 울지마오! 어디에 잠들든 묻힌 삶은 서럽고 외로운 법
이라오. 당신은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집으로 돌아가십시다,
선생님.
지금쯤 그 남쪽 항구에는 따스한 불빛이 번지고 포근하게 눈이 내
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다. 그곳으로. 왜 나
는 아직도 그렇게 권유하지 못하고 이 소름끼치게 음산한 베를린의
겨울 하늘 아래 선생님을 두고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까. 그토록 완강
하던 이념의 벽마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거늘 더 무슨 통한이 남아
당신은 이 얼어붙은 남의 땅검은 흙 아래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
까.
89년이던가요?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하던 어느날 화랑 주인이 선
생님과 전화연결을 해주었지요. 동양화를 한다는 말에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셨습니다. 내 음악의 많은 부분은 우리나라의 옛 그
림들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설명해 주시면서 "언제 한번 꼭 집
에 놀러 오라"고 하셨지만 그 '언제 한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베를린에 머문 이 며칠 동안 나는 닥터 발터 볼프강 슈파러를 비
롯한 '윤이상 음악의 생도'들을 여럿 만나 보았습니다. 그 중엔 당신
을 유럽음악의 성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신경증적으로 흘러
가던 현대음악 속에서 사람과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나게 한 음악의
철인, 음악의 도인이라고 표현하는 평자도 있었습니다. 도인일 뿐 아
니라 선생님에게서는 조선의 선비정신이나 지사적 풍모가 풍겨나기까
지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음악에는 우리 산, 우리 물이 살아
있습니다. 확실히 '물가의 은둔자'의 그 플룻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대숲을 쓸고가는 바람소리가 들립니다. 선생님의 어느 곡을 듣고 있
더라도 눈 앞에 확연히 우리의 자연이 열리는 것입니다. 쏴아하는 솔
바람소리가 지나가고 하늘을 나는 고구려 벽화 속의 사신도가 보입니
다.
그 길고도 파란만장한 망명생활에도 불구하고 풍토가 예술을 낳는
다는 것은 선생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제 무식을 용서
하십시오.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무악', 클라리넷 독주를 위한 '피
리' 같은 곡의 클라리넷과 하프와 플룻의 소리가 제 귀에는 대금이나
퉁소로 바뀌어 들려옵니다. 환쟁이 티를 내 송구합니다만 선생님곡의
그 맑고 깊은 어둠에 잠겨 있노라면 거의 늘 가슴으로 번지는 수묵화
의 세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떠나 있어도 조국의 자
연, 조국의 현실은 늘 동심원이 되어 당신의 음악 그 심부에 머무르
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동과 서가 서로 갈등하거나 적대적이지 않고
상생의 관계로 만나졌건만, 그러한 당신의 음악에 의해서도 유독 민
족의 분열만은 여지껏 치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숭고한 사랑치고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분단 조국
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골수에 맺히는 고통과 눈물의 연속이었습니다.
"결혼을 제외하고 내 생애는 언제나 분단의 경계 위에 선 것이었
다. 내 음악의 대부분은 그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바쳐졌다"고 회상
했던 것처럼, 어쩌면 분단은 당신에게 운명 같은 것이었는지 모릅니
다. 남북분단 국가에서 생애의 전반부를 보내고 동서분단 국가에서
그 후반부를 보냈으며 심지어 생가나 묘소마저도 옛 동서베를린의
경계선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말입니다.
엊그제 당신이 떠난 호숫가 클라도우(Kladow)의 빈 집에 다녀왔습
니다. 거대한 도토리나무와 소나무의 완만한 내리막길에 자리한 그
빈 집은 아무리 벨을 눌러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언제 한번 놀러오라
던 선생님의 말씀에 그러마고 했지만 제가 너무 늦게 도착한 걸까요.
나는 당신이 늘 산책을 했다는 집 뒤의 소나무 숲길을 걸어 호숫
가로 내려섰습니다. 그러고는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짓
말처럼 정겹고 푸근한 강 같은 호수는 그 물빛과 풍광이 통영 앞바다
의 것 그대로였습니다. 통영 앞바다를 탯줄로 하여 태어난 사람은 평
생 그 탯줄을 자르지 못한다는데, 정박되어 있는 배처럼 선생님도 끝
내 그줄을 끊지 못했던 것일까요.
나는 비로소 왜 당신이 베를린 시내에서 40여 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이 한적한 교외를 택해 거처를 정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물
건너로 산자락이 펼쳐지지 않는 것만 다를 뿐, 몇 번을 살펴보아도
완전히 또 하나의 통영이었습니다. 당신은 고향과 비슷한 곳을 택해
서라도 못이룬 귀향의 꿈을 달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고향
과 민족에 자신의 정신적 머리를 두었던 당신은 그러고 보면 위대한
음악의 도인, 음악의 성자이기 이전에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해 눈
물지었을 실향민의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글-그림 김병종·서울대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