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이래 회화의 정식을 파괴, 20세기 미술의 출발점을 연 큐비
즘은 피카소가 1907년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처음 선보인 것이었
다. 피카소는 인체를 기하학적으로 변형시키고 전통적인 원근법을 완전
히 부정했으며, 종래의 명암법과 채색법을 무시했다. 미술의 기존 질서
에 대한 파괴를 통한 혁명이었다. ( 홍사중·조선일보 논설고문 ).
"자네는 우리에게 솜뭉치를 먹이고, 석유를 마시게 하려는 것 같군.".
1907년 늦여름, 스물여섯살의 피카소(1881∼1973)가 몇달동안 두문불
출하며 매달려온 작품을 처음 본 동료 화가 조르주 브라크(1882∼1963)
의 첫 마디는 이랬다. 100여장에 이르는 데생과 무수한 덧칠 끝에 완성
한 작품은 사방 6m에 이르는 대작이었다. 바르셀로나 홍등가 아비뇽거리
매춘부 5명을 그린 이 작품은 아직 이름도 안붙은 신생아였지만 피카소
의 동료 선후배들은 첫 대면에서 축복 대신 혹평부터 퍼부어댔다. 거장
마티스는 화를 냈고, 그때까지 무조건 피카소 편을 들어주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철학적 유곽"이라고 쏘아붙였다. 20세기 미술의 시발점으
로 평가받는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이렇게
태어났다.
작품을 보면 당시 미술계가 느낀 경악과 당혹이 이해가는 구석도 있
다. 남성을 유혹하는 젊은 여인의 윤기 흐르는 피부 대신 도끼로 떠낸
듯한 살결, 왼쪽 눈은 정면을 보고, 오른쪽 눈은 4분의 3 각도로 옆을
쳐다보고 있는가하면,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여인의 아프리카 탈 모양
얼굴은 똑바로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괴하고 폭력적이며 혐오감을
주는, 당시 기준으론 '비상식적'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경악하던 브라크가 1908년 입방체(큐브)를 쌓아놓은 듯한 풍
경화들을 가을 살롱전에 출품했다. 불과 1년전 화를 내던 마티스도 이젠
브라크의 그림을 보고 '큐브'라는 이름까지 붙여줬다. 의기투합한 피카
소와 브라크는 본격적으로 '입체주의' 작품들을 잇달아 내놓고 이내 파
리화단은 '입체주의' 열풍에 빠져들게 된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 데생을 시작한 것은 1905년. 아인쉬타
인이 상대성 이론을 공식화하며 뉴튼의 법칙들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해
다. 인문과학에서도 니체와 프로이트가 데카르트 이후 서구지성계를 주
도해온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를 깨뜨리고 있던 때다. 이런 20세기초 유럽
지성계의 도도한 흐름에 대한 미술쪽의 화답이 바로 '아비뇽의 아가씨들',
입체파의 등장이었던 셈이다.
젊은 시절 피카소의 성에 대한 쾌락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섞여있다
고 평가되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르네상스 이후 500년 가까이 군림해
오던 회화의 '법칙'들을 해체한 대혁명이었다. 물론 사물을 원추, 원통,
구로 나눠서 보는 시도는 세잔느가 시작했고, 원근법과 명암법을 무시한
것은 야수파가 먼저였으며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관심은 마티스가 앞섰
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를 통합해 '아비뇽의 아가씨들' 속에 집어넣어
입체주의를 촉발시킨 것은 피카소였다. 무엇보다 사람과 사물을 있는 그
대로 옮겨야 한다는 '재현'에 대한 고정-강박관념을, 피카소는 이 그림
한장으로 날려버린 셈이었다.
1914년 1차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입체주의는 사그라들었고, 피카소도
입체주의 대신 러시아 발레에 푹 빠진다. 그러나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
가씨들'을 내놓으며 철저히 해체하고, 갈아엎어 놓은 터에선 현대추상미
술의 새 싹들이 무수히 돋아나 건축, 디자인에까지 영향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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