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최남선은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발상을 뒤집어 '소년에게서 해에
게'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20세기 문명의 발신자가 아니라 언제나 그 수
신자로서 살아온 우리의 비밀이 바로 이 제목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아
닌가. 한복이 양복이 되고 한옥이 양옥으로 바뀌는 대양(바다)의 문명
앞에서 우리는 백년동안이나 소년이었다. (이어령·이화여대석학교수).

1906년 겨울, 만 16세의 최남선(1890∼1957)은 일본 동경을 떠나 서

울로 돌아왔다. 그해 4월 와세다대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했던

그는 일본 학생들이 조선 국왕을 모독하는 모의국회를 열려 하자 이에

항의하여 다른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자퇴한 터였다.

그러나 현해탄을 건너는 배에 오른 최남선은 유난히 짐이 많았다. 동
경에서 사들인 인쇄기, 주조기, 자모기 등과 일본인 기술자 두명이 그와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 일찌기 언론과 출판에 관심이 많았던 최남선은
귀국 직전고국의 아버지를 졸라 막대한 돈을 들여 최신 인쇄시설을 장만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08년 11월 최남선은 이 인쇄시설을 이용해 우리
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창간호 독자는 6명, 2호는 14명에
불과했고 1년이 지나도록 200명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소년'은 최남선
을 중심으로 이광수 홍명희 등이 필자로 참여한 당시 최고의 잡지였다.
그러나 '소년' 창간호는 이보다 훨씬 중요한 문명사적 의미를 담고 있었
다.

여기 실린 최남선 자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통해 도도한 서
세동점, 제국주의 침략의 암운 속에 새 세기의 새벽을 맞는한국인 의식
의 주소를 밝힌 것이었다.

"텨…띵썩, 텨…띵썩, 텨 쏴…아/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태산갓
흔 놉은뫼, 댑태갓흔, 바위삥돌이나/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텨…띵썩, 텨…띵썩, 텨 투르릉, 콱." (제1연).

보통 '최초의 신체시'로 불리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소년'의 권
두시였다. 18세의 천재소년 육당은 바다를 빌어 새 시대의 주역인 소년
은 힘차고 두려움을 몰라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무엇보다 한국인의 시선이 대륙을 떠나 바다로
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
양을 잇는 반도에 자리잡고 있지만 한국에게 수천년동안 문명은 곧 대륙
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1876년 개항을 계기로 선진문물은 이제 대륙이
아니라 바다를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양복, 양장,양식, 양화,
양품, 양산등 '양물'이 사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바다 양'자는 곧 서양
을 의미했고 거기서 오는 것은 곧 좋은 것이란 등식, 이런 생각이 바로
당시 첨단 지식인의 사고가 도달한 결론이었다는 사실은 근대 한국사의
전개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20세기의 한국인이근대(서양) 문명에 대해
가졌던 경사된 시각이 함축돼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대서양을 제
압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 시인 바이런은 그의 시 '바
다(Ocean)'에서 대양을 향해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를 담았다. 반면 육당
은 소년을 향한 바다의 음성을 표현했다.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
는 우리는 이제 '소년에게서 해에게'란 또 하나의 작품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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