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레트는 매일 아침 면도를 해야만 하는 세일즈맨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아침 무디어진 면도날로 얼굴을 벤다. 이때 그에게 떠오른 생
각이 쓰다가 칼날이 무디어지면 버리고 새것으로 갈아끼우자는 것이
었다. 면도에서 면도날을 분리시키는 분해와 대치의 아이디어였다. 그
의 아이디어가 20세기 남성의 얼굴과 생각을 바꿔놓았다. (이어령 이
화여대 석학교수).

19세기까지 남성 상징은 수염이었다. 그러나 20세기는 남성 얼굴에

수염이 없는 세기다. 이같은 남성 혁명의 일등 공신은 인류 최초 안전

면도기를 발명한 킹 캠프 질레트였다.

1901년 12월 2일 세일즈맨 출신 발명가 질레트는 동료 닉커슨과 공
동으로 안전 면도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1902년 대량 생산에 들어갔지
만, 51개 면도기와 168개 면도날을 파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듬해 질
레트는 9만개 면도기와 1,240만개 면도날을 생산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 속에서 생활했던 병사들에게 질레트 면도기가 지급됐고, 종
전 후 귀환 병사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대중화됐다. 오늘날 질레트사는
매일 1억2,000만명이 지구촌각지에서 질레트 면도기를 사용한다고 자
랑한다.

질레트 면도기는 세일즈 맨의 시대인 20세기적 발명품이다. 질레트
가 늘 깔끔한 용모를 유지해야 하는 세일즈 맨이었기에 편리하고 안전
한 면도기를 꿈꾸었던 것. 하찮은 생활용품이지만 질레트면도기에는
20세기문명의 비밀이 숨어있다.

면도날을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20세기적 분리-조립 시대의 정체성이다. 원래 동양은 전체
를, 서양은 부분을 중시했다. 동양이 칼을 고집하고 있을 때 서양은
분해조립되는 소총을 개발했다. 몸체와 부품이 분리되는 질레트 면도
기는 그같은 서양적 사고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20세기가 부품 조
립 생산 시대가 된 것은 질레트적 사고가 서양 사회에서 보편화된 결
과다.

부품 사회는 '작은 것의 위대함'을 입증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 라
디오 시대가 열렸다. 모든 전자제품에 필수적인 회로 부품 '트랜스포
머'(변압기·1879년 발명)가 실용화됐기에 가능했다. 한국인은 40년대
에야 트랜스포머를 처음 만났다. 소형 모터 등장은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 컴퓨터, 호출기 생산을 촉진시켰다.

질레트 면도기가 발명된 해에 인스턴트 커피도 처음 등장했다. 소비
자가 숙련된 솜씨없이 사용할 수 있는 상품 시대가 열렸다. 초창기 질
레트면도기 광고는 갓난 아이가 면도하는 그림이었다. 질레트 면도기
는 인류에게 '대체' 개념도 불어넣었다. 오늘날 장기 이식 수술은 그
같은 '대체 문명'의 최정점을 보여준다.

질레트는 면도기 발명가로만 생애를 마치지 않았다. 공상적 사회주
의자였던 그는 '민중의 협동'(1924)이란 책을 통해 경쟁은 비합리적이
라면서 민중이 모두 주주로 참여하는 거대 회사를 통해 제품을 생산하
는 경제 체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이상주의는 면도기만큼 인기를
얻지 못했고, 그 책은 일회용품처럼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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