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새벽 3시 30분. 서울 중구 신당동 남평화시장 1층내 가방전문상
가 가게문이 하나 둘 열리는 시각. 문인기(47)씨는 형광등 불빛에 가방
을 비춰가며 구석구석 바느질 자국을 훑어봤다.

"일본 바이어들은 굉장히 꼼꼼해서 실밥 하나라도 튀어나오면 퇴짜
예요. 새벽 맑은 정신으로 제품을 봐야 흠집이 눈에 잘 띄지요.".

두달째 문씨와 거래한 가방가게 박 사장은 "물건 고르는 게 이제 시

장사람 다 된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물건을 더 구경한 뒤 시장골목안

포장마차에서 어묵국물을 마시는 동안 날이 밝았다.

"직장생활 19년 동안 한번도 영업이란 걸 해본 적 없었죠. '시장에
오면 굶어죽진 않는다'는 믿음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대기업 총수를 10년 넘게 최측근에서 보좌한 비서실 부장출신 직장
인에서 시장을 누비는 영업맨으로의 변신. 다른 퇴직자 7명과 함께 동
대문의류상가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가방, 정수기, 건강식품을 도매로
판매하기 시작한 지 두달이 눈깜짝할 새 흘렀다. 아직 영업실적은 별로
없지만 양복보다 잠바차림이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에 익었다고
했다.

문씨가 회사를 떠난 것은 IMF 한파가 몰아닥친 97년 12월. 퇴직후에
는 다섯달 동안 병원을 돌아다니며 중환자를 위로하는 간병인 일을 자
원했다. 죽음 앞에 선 이들의 뒷수발을 하면서 문씨는 살아있음과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하지만 독한 맘으로 뛰어들었다고 해도 물건을 판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버스비 아끼려고 1시간 넘게 걸어 찾아간 친구가 슬그머니 화제를
바꿀 때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문전박대받은 것도 여러번. 밤 새워 물건특징을 외우고 손님에게 건
넬 말도 꼼꼼히 메모하다 보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새로운 인생을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99년은
매출을 두배로 늘리는 희망으로 살아갈 생각입니다.".

지난해말 퇴직한 동기 송년회 모임에서 1년 사이 변한 자신을 보고
놀라는 친구들 앞에서 "새해에는 IMF 한파쯤 너끈히 이길 수 있다"며
으스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