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한 시인이 천국으로 떠났다. 조의금이 몇백 걷혔다. 생전에
그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 없는 시인의 장모는 가슴이 뛰었다. 이 큰
돈을 어디다 숨길까. 퍼뜩 떠오른 것이 아궁이였다. 거기라면 도둑이 든
다해도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노인은 돈을 신문지에 잘 싸서 아궁이
깊숙이 숨기고서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시인
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이상했다. 땔나무 불빛 사
이로 배추이파리 같은것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조의금은 그렇게 불타버렸다. 다행히 타다남은 돈을 은행에서 새돈으

로 바꾸어주어, 그 돈을 먼저 떠난 시인이 「엄마야」며 따르던 팔순의

장모님장례비로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늘 「엄마」의 장례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시인 천상병가의 이야기이다. 평생 돈의
셈법이 어둡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왔던 시인이었다. 지상에 소풍왔던 천
사처럼 무구하게 살다간 시인의 혼은 가고 남은 자리마저 그런 식으로
자유로와 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숫자 계산에 어둡고 어린애 같은 셈법으로 살다간 시인은 사
실「서울상대」 출신이었다.

우리 모두는 천상병 시인을 사랑했다.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세속
과 악의 혐의가 짙을수록 그 어린아이 같은 시인을 그리워했다. 지상에
서 가난했고 고초당했던 그 시인은 그러나 천국에 가면 땅은 선한 것이
었다고, 지상은 아름다왔노라고 전할 것이라고 썼다. 악은 그의 머릿속
에도 없었고 가슴에도 없었다. 악에 관한 한 그는 지진아인 셈이었다.

사물과 사람을 투명하게 관조하여 그려내었던 천상병은 그러나 1967
년 7월 친구 한 사람이 동백림사건에 연루되면서 엉뚱하게도 기관에 끌
려가 전기고문을 받게 된다. 그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된다. 뜻밖의 고초와 충격으로 그의 정신
은 황폐해졌고 어느날 거리에 쓰러져 행려병자로 분류되어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어디에선가 죽은 것으로 생각해 유
고시집 '새'를 출간하고…. 유명한 사건이었다. 유독 어린아이를 좋아했
던 시인은 훗날 아내에게 『전기고문을 두 번만 받았어도 아기를 볼 수
있었는데…』하며 아쉬운 마음을 술회하곤 했다 한다.

동백림사건 이후 그의 시세계는 죽음 저편을 바라보는 초월의식과 함
께 종교적 원융무애의 어린아이 같은 세계로 나아간다. 엄청난 고초를
겪었지만 절망과 증오와 비탄 아닌 맑고 투명한 어린아이의 세계를 열어
보인 것이다. 그 점에서 그는 성자였다.

병구완에 헌신적이었던 아내 목순옥을 그는 하나님이 숨겨두셨던 천
사라고 했다. 그는 생전에 고문 후유증으로 활발한 걸음걸이가 아니었지
만 인사동에 나오기를 즐겨했다. 아니, 인사동 골목의 아내가 하는 작은
찻집 「귀천」에 나오기를 좋아했다. 귀천에 나오면 무엇보다 하루종일
아내를 볼 수 있어 좋고, 문인·화가·연극인 같은 다정한 사람들을 만
날 수 있어서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빨간 옷 입고 오는 여자나 안경 낀
남자는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무슨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싫어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아이 같은 일면이다. 빨간 옷 입거나 안경
낀손님이 오면『문디가시나 문디가시나』하며 아내를 원망했다는 것이다.

그의 행복에 대한 고백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루에 용돈 2천 원이면 나는 행복하다… 내가 즐겨 마시는 맥주 한
잔과 아이스크림 하나면 딱 좋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좋아했다. 바
늘귀를 통과하는 낙타가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딱한 노릇이다. 굶지 않기만 하면 되는데… 내게 만일 1억 원이 생
긴다면 나는 이 돈을 몽땅 서울대학교에 기증하겠다. 장학금으로….』.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
리 새(「새」)처럼 가볍게 살다가 시인은 이제 인사동을 떠나 천국으로
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
다웠다고 말하리라…(「귀천」)고 작별을 고하며.

천상병이 떠나버린 인사동은 쓸쓸하다. 야트막한 집들과 필방과 도자
기와 그림과 그리고 한국차와 시의 동네 인사동. 모든 것이 번쩍거리기
만 하는 시대에 무채색으로 가라앉아 있어 정겹던 그 인사동. 이제는 그
동네도 반들반들 닳고단 상업의 거리가 되어간다. 인사동이 때묻어 갈수
록 시인의 맑고 투명한 정신이 그 때묻음을 씻어내고 정화시켜 그래도
인사동의 인사동다운 맛을 지켜내었건만, 그 인사동 지킴이 천상병은 새
되어 천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촉수 낮은 「수희재」 전등 밑에서 세
상과 인생을 들려주던「민병산 선생」 떠나고, 인사동을 홀로 지키던
「귀천」의 시인 천상병마저 천국으로 돌아가버려 인사동은 허전하기 그
지없다.

하늘이 낮게 가라앉고 눈발이라도 흩날릴 때 「귀천」을 찾아가는 마
음들이 비단 그 모과차의 따뜻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저기 저만
큼 어두운 한쪽에 언제나처럼 앉아 있던 시인의 순수가 더 그리워서였을
것이다.

(글-그림 김병종·서울대미대 교수).

천상병(1930~93)
일본에서 출생하여 마산에 정착. 마산중학을 나와 서울대학교 상과
대학을 수료하고 '문예' , '현대문학' 등을 통해 시와 평론을 발표했
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육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고문후유
증으로 고생했다.

시집으로 '주막에서(1979, 민음사)' ,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
오상출판사)' , '저승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일선출판사)' 등
여러 권이 있고 동화집과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