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신문화연구원 새 원장에 선임된 한상진 서울대교수(53·사회
학)가 선임 후 처음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한 원장은 김대중 대
통령의 측근 조언자이자 '제2건국 운동' 브레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
원장은 앞으로의 정문연 성격을 묻는 질문에 대해, '제2건국 운동' 과
정에서 정문연의 역할을 강조한 김종필 국무총리의 말을 인용하는 것
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화부 김태익 차장대우가 한 원장을 서울대연
구실에서 만났다.
-역대 정문연 원장 중에서 가장 젊으신 것 아닙니까? 한 교수 발
탁을 의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반응은 전임자들이 학계 원로이거나 전직 총리였기 때문일것
입니다. 이제는 정문연의 대외적 위상 보다는 내실을 기할 때라고 판
단하고 정문연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젊은 사람을 보내자는 뜻에서 저
를 선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평소 정문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는지요.
"정문연에 근무하거나 운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학술회의와 연
구 프로젝트 등을 통해 정문연이 아주 낯설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그
동안 정문연에 창의성과 자율성이 충분히 꽃피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
다. 내부 성원들이 유기적으로 충분히 협력했느냐 하는 것도 의문이고
요.".
-정문연은 출발 때부터 '국학연구의 본산'과 '통치이념의 산실'이
라는 두 방향이 대립을 벌여 왔습니다. 한 원장의 전공이나 성향이 보
통 생각하는 국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제는 '국학' 보다는 더 넓은 '한국학(Korean Studies)'이란 개
념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협력, 동
양과 서양의 교류를 필요로 하지요. 정문연을 이전보다 더 개방적인
체제로 만들어 학제간 대화와 공동연구에 중점을 둘 생각입니다.".
-한 원장 체제의 정문연이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은 한 원장이 김대
중대통령의 핵심 참모중 한 사람이고 '제2건국'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아마 김종필 국무총리께서 제2건국에서 정문연의 역할을 강조하셨
기 때문에 정문연과 제2건국의 관계에 더욱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 당시 '조국근대화'가 시대적-민족적 과제였듯이
지금은 그동안 잃어버렸던 민주주의, 인권, 시민사회 등을 되찾는 '제
2건국'이 과제라고 생각하며 그런 점에서 김 총리의 발언이 틀리지 않
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말씀으로 보면 정문연을 '제2건국운동'의 이념적 기초를 다
지는 기관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는데
요.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제2건국은 '기본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지, 결코 정권적 차원의 발상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
서 볼때 정문연에 기대하는 것은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아시아의 정
신과 이념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우리
의 문화적 뿌리를 재조명, 재해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촌에서 보
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수용하여 이를 종합해 내야겠지요. 국
책연구기관인 정문연은 출발 때부터 이런 집단적인 지적 활동에 유리
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학문 연구기관에 대해 그렇게 현실성을 지나치게 강조하
다보면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우려가 제기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정문연은 정부나 원장의 뜻대로만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내
부 성원들의 의사가 존중될 것입니다. 누구나 연구주제 선택 등에서
압박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현실과 유리된 상아
탑주의는 우리의 선비문화 전통이 아니며 더구나 정문연과는 맞지 않
다고 생각합니다. 학문공동체로서의 정문연은 현실과 깊은 관련을 갖
는 연구와 해석이 강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20년간 정문연을 이끌어 오신 분들도 한 원장과 마찬가지로
사명감과 현실적 필요성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현 정
부는 야당시절 정문연의 그런 정치적 성격을 비판했고요. 그분들과 한
원장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70∼80년대에는 권위주의적으로 전통을 해석하고 충효등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개발, 홍보하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인권, 평화같은 보편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차이겠지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힘 있는 학자들이 새로 등장하곤 합니다. 지
식인도 때로 정치적 '힘'을 필요로 할 때가 있는 겁니까?.
"저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열정이 없으면 학문의 의의는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지식인이 곧 정치권력과 직접 연결되어야 한다
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지식인의 힘은 자리를 통해 주어지기 보다
내면의 확신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
-한 원장은 정문연 외에도 많은 외부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
고 서울대 교수 직을 갖고 파견 형식으로 정문연 원장을 맡는 것에 대
해, 의욕이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어떤 조직의 책임을 맡은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당연히 앞으로는
정문연이 저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저는 정문연의 소
중한 경험을 살려 서울대에 봉사하고, 서울대 평교수로 정년퇴임하고
싶습니다. 권력 욕구를 자제하면서 학문을 통해 현실에 참여하는 용기
있는 지식인이 되는 것, 이것이 저의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