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프와 넥타이를 수출하는 무역회사 이사인 김종배씨(가명)
는 두발 뻗고 편히 잠들지 못하는 불안한 생활을 벌써 반년넘게 해
오고 있다. 한번의 잘못된 수출로 사기를 당한 뒤 지난 3월부터 9
월까지 수십차례에 걸쳐 수출대금으로 받은 피같은 생돈을 물어줬
기 때문이다.
수출 경력 20년. 왠만한 무역 사기는 꿰뚫고 있다는 그였지만
배서 위조라는 사기 수법에 걸려 수출대금을 날리고 말았다. IMF가
터진 직후인 지난해 연말 김씨는 나이지리아의 수입업체들로부터
9000여만원 어치의 스카프와 넥타이를 보내달라는 수출 의뢰를 받
았다. 수입업체들은 의뢰서와 함께 대금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발행
한 수표를 보내왔다. 은행에 추심을 돌린 결과 '정상' 판정이 나왔
고, 수출대금을 받은 김씨는 약속한 대로 물건을 보냈다.
내수시장이 막혀 수출에 목숨을 건 마당에 선금 받고 9000만원
이상의 물건을 팔았다며 좋아했지만 그것도 잠시. 지난 3월 국내
거래 은행으로부터 '배서가 위조된 수표'라는 연락을 받고 돈을 물
어줘야했다 . 이후 한 두 개씩 들어오기 시작한 배서위조 수표들이
김씨를 괴롭혔다. 그는 "9월 말까지 띄엄띄엄 수표가 돌아왔으며
그때마다 돈을 물어줘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기업체를 찾아내 소송을 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건당
3만달러나하는 수십개의 소송을 하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어 포기
하고 말았다"고 했다.
IMF 이후 수출전선에 뛰어들고 있는 국내 업계를 대상으로 이같
은 해외 수입업자들의 사기행각은 날로 극성을 부리고 있다. 내수
시장 돌파구를 해외에서 찾으면서 경험이 없는 이들을 노린 사기꾼
바이어들이 가세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무공·KOTRA) 고객서비스처 이평복 부장
은 "올해 들어 특히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의 무역 사기꾼들이 한국
수출업자를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쓰는 사기 수법은 대략 3가지. 대형 주문을 내겠다며 유
혹해 샘플을 보내라고 한 뒤 주문을 취소하는 소액 샘플사기와 개
인수표를 이용한 상품구매 사기, 유령 은행의 가짜 신용장을 이용
해 수입대금을 떼먹는 수법 등이다. 또 물건을 수입하겠다며 수출
업자를 불러 들여 돈을 강탈하는 국제강도가 나타나는가 하면, 유
력 바이어 리스트를 보내주겠다며 수출업자들에게 무차별 팩스 공
세를 펴돈을 뜯어낸 뒤 자취를 감추는 수법도 등장했다.
김씨는 개인수표를 이용한 배서위조 사기에 당했다. 김씨는 "대
형 종합상사에서는 별로 사용하지 않지만, 수많은 수출 개미군단은
지금도 개인수표를 주요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기
를 당할 위험이 높다"고 지적했다.
그는 "배서위조를 하려면 남의 수표를 훔쳐서 사용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대부분 수표 주인과 사기 수
입상이 결탁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과정은 이렇다. 수표 주인이 일정액을 받고 개인수표를 수입상
에게 넘기면 수입상이 엉터리로 배서해 수입 주문을 낸다. 추심이
들어오면 수표 주인의 계좌에 잔고가 남아 있어 정상적으로 수출대
금이 지급된다. 이후 수표주인이 도난당한 수표라며 돈을 돌려달라
고 지급은행에 요구해 수출대금으로 빠져나간 돈을 회수하는 것이
다. 이때문에 가끔은 돈을 떼인 국내 은행과 수출업자 간에 법정
분쟁까지 빚어지기도 한다.
김씨는 "수출대금을 받았다가 토해내는 황당한 경험을 하지 않
으려면 수입업자 외에 제3자가 발행한 수표나 배서된 수표는 아예
받지 않아야 하고,수입업자가 발행한 수표라도 선적하기 전에 추심
을 돌려 입금을 확인해야한다"고 말했다.
피해 액수는 적지만 샘플사기도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IMF 이
후 시장 개척에 애태우는 국내 수출업자들에게 대형 주문을 내고
샘플을 보내라고 한 뒤 이를 사취하는 수법이다. 몇 푼 안하는 샘
플이라도 공짜로 뜯어내는 이런 유형은 주로 후진국 수입상들이 쓰
는 수법이다.
D무역 김모 사장도 샘플사기를 당한 경우. 그는 아프리카 베냉
공화국의 수입업자로부터 "190만달러 어치의 컴퓨터와 관련 부품을
수입하려 하니 샘플을 보내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 사장은 "샘플
도착 시점에서 수입업자가 컴퓨터 전시회 출품에 필요하니 추가로
두개를 더 보내 달라고 요구해왔다"며 "베냉에서 컴퓨터 전시회가
열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알아봤더니 사기업체였다"고 말했다.
사기업자가 은행에 수입대금을 예치했다며 보내온 영수증도 가
짜였다. 그는 "현지에 알아본 결과 한 사무실에 전화와 팩스하나
놓고 수입상과 은행장까지 하는 사기꾼이었다"고 말했다.
최근에 가장 극성을 부리는 사기 유형은 유령 은행(paper bank)
을 만든 뒤 가짜 신용장을 보내와 수입대금을 떼먹는 수법이다. 무
공 이평복 부장은 "올해 들어 수입업자들의 신용장 사기 수법에 당
한 국내수출 피해액이 남미 지역에서만 200만달러에 이른다"고 밝
혔다.
가짜 신용장에는 대기업이나 종합상사들도 당하고 있다. 최근
대기업 계열의 한 종합상사에서 30만달러 어치의 직물을 수출했다
가 가짜신용장에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용장의 진위를 밝힐 수
있는 개설은행 암호(test key)를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부장은 "대기업의 경우 피해를 입어도 쉬쉬하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확인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중소기업과 달리 대
기업들은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신용을 깎아먹기 때문에 적
극적으로 대책을 세우지도 못한다.
이 부장은 "유령 은행 수법은 수출 목표 달성을 독려해 신용장
을 자세히 확인하기 힘든 연말에 집중적으로 일어난다"며 "가짜 신
용장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암호는 물론, 은행이 실제로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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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바이어 신용 조사
무공·D&B 등 2곳…최근 의뢰 크게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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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바이어들에 의한 사기 피해 사례가 늘어나자 수출업자들에
게 외국 바이어들의 신용도 및 사기업체 여부를 조사해주는 조사대
행 기관들도 함께 바빠지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외국 바이어들의
신용조사를 대행해주는 곳으로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와 민간회사
인 던 앤드 브랫스트리트(D&B) 한국지사가 대표적.
무공은 신용조사 의뢰가 들어오면 100여개에 이르는 해외 현지
무역관을 통해 현장 답사를 실시, 업체나 은행의 실재 여부를 확인
해 알려주고 있다.
무공 해외시장 조사팀 박용민 대리는 "올해 9월까지의 신용조사
의뢰건수는 모두 408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351건보다 크게 늘
어났다"고 밝혔다.
D&B는 1841년 창립된 해외 신용조사 기관으로, 80여 지사와 300
여개에 이르는 현지 사무소를 동원해 축적한 5200만개의 개별기업
신용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제공하고 있다. 고객 지원부 서지연
씨는 "바이어의 실재 여부는 물론이고 수출거래 결정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3개년간의 재무재표와 그간의 수출대금 지급 행태, 회사
의 신용등급 등을 알려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