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식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 #####.
육본 작전교육처장 장경순 준장은 전북 김제 출신인데 별명이 '농
림부장관'이었다. 평소에도 농촌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별
명이 붙은 것이었다. 이 별명 때문에 그는 혁명정부의 초대 농림부장
관이 된다. 혁명내각의 장관들을 뽑는 인사 중심역할을 한 사람은 오
치성 대령이었다. 오 대령은 '농림부장관' 장경순을 진짜 농림부장관
으로 천거했던 것이다. 장경순은 박정희에게 인사차 가서 이렇게 물
었다.
"각하, 제가 농림부장관이지요?"
"그럼 당신이 농림부장관이 아니면 누가 장관이오."
"그러면 하루라도 소신껏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장 장관은 전 직원들을 집합시킨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시각 이전의 문제는 일체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습니
다. 내 전임자는 여러분들을 지금 그 자리가 최적의 자리라고 생각하
고 임명했을 것입니다. 처음 부임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인사 이동
을 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소신대로 일해주십시오 . 나하
고 근무할 수 없는 사람은 딱 두 종류 뿐입니다. 첫째는 무식한 사람
입니다. 자기 할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이 바로 무식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자기가 맡은 일 이외에 대해
서는 나에게 이야기하지 마시오. 남의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사람은
내가 즉각 해임시키겠습니다. 둘째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자기 맡은
일도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식하고 무능한 사람은 나와 함께 일
할 수가 없습니다. 농림부는 너무나 할 일이 많습니다.오늘부터는 토
요일도, 일요일도 없습니다.".
과거를 불문에 붙이겠다고 하니 약점이 많은 공무원들은 안심하
고 '죽자 살자 일을 했다'는 것이다. 장경순은 박정희 부의장에게 이
런 보고를 올렸다.
"우선 농어촌 고리채를 정리해 주어야겠습니다. 또 하나는 묘지
문제입니다. 논이고 밭이고간에 묘지 천지입니다. 이래 갖고는 농사
가 안됩니다. 묘지도 이 기회에 정리해야겠습니다."
"고리채 정리는 옳은 일이지만 묘지 이야기는 잘못 꺼냈다가는
혁명정부가 견딜 수 없을 거요. 나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문제는 차후에 의논합시다.".
장경순은 8기 특별기 출신이자 한때 전북중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던 적이 있는 김기봉 중령을 장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김기
봉(현재 77세)은 군인의 눈으로 본 당시 공무원 사회의 실상을 이렇
게 회고했다.
"당시 공직사회에는 대학졸업자도 많았지만 그들이 배운 지식은
잘 실천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귀납법과 연역법을 군대에서 배
웠습니다. 정보 수집을 하여 적정 판단을 내리는 과정은 귀납적입니
다. 몇 가지 상황을 상정하고 그 중 하나를 고르는 과정입니다. 이것
이 행정 실무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의
정책을 세워 놓고 그 목표를 달성해가는 과정은 연역적입니다. 군의
작전계획 등 모든 계획이 연역법의 논리에서 파생된 행정 기법입니
다. 민간분야의 낙후성은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장교들은 미국 유
학을 다녀와서 선진화되어 있었던 반면에 민간분야는 그런 행정-경영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한국군은 미국의 우수한 행정학자들
이 모여 만든 군사행정기법을 전수받아 이를토대로 전쟁을 치르고 양
병을 해가던 시절입니다. 보고서를 작성해도 일목요연하게 강조할 부
분을 제목으로 뽑곤 했지만 농림부에 와 보니 온통 미사여구로 장식
된 문장 속에서 무엇이 강조되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습니다. 타자기
를 활용하지 못하고 먹지를 밑에 받치고 쓴 복사문건들은 바래져 무
슨 글자인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우선 타자기를 보급하고 배우도
록 권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장관들은 내각회의를 하기 전후에는 박정희 부의장에게 들려 보고
를 하곤 했다. 박정희는 꼼꼼한 것까지도 따져묻는 바람에 업무가 폭
주했다. 이석제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이 건의했다.
"각하, 사소한 것들은 내각에 일임하시죠. 그 시간에 다른 큰 일
을 하시거나 좀 쉬십시오."
"알아. 내가 지금 업무를 파악하느라고 그래.".
박정희는 착실한 학생처럼 국정을 공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박
정희의 이런 자세는 다음해를 넘기면서 풀어지는데 그때 쯤이면 국정
의 흐름을 대강 파악한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박정희는 장기 집권
때문에 죽기 전에는 국토개발등 국정 전반을 한 손에 잡은 것처럼 환
하게 파악하여 장관들의 기를 죽이곤 했었다.
실정법의 질서를 무너뜨린 군사정권이 건국 뒤 가장 큰 법률정비
를 단행하여 우리나라의 법치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게 된 경위는 이러
하다.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는 군정을 뒷받침할 입법활동을 하
다가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법령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조
선총독부 시절에 쓰던 일제의 법령과 미 군정법을 그대로 쓰고 있었
다. 광복된 지가 16년, 한글전용법이 만들어진 것이 1948년인데 자기
나라말로 된 법령집이 없다니 이게 무슨 주권 국가인가 하는 한탄이
나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일본어와 영어로 된 법률로 다스리다
니…'하는 울분이 솟은 이석제는 즉시 개혁에 들어갔다.
박정희 부의장에게 실정을 보고하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조선총독부의 법률로 운영해왔단 말인가. 나
라가 어찌 되려고 이 모양이었던가. 통탄할 노릇이군. 도대체 국회의
원과 정치가와 공무원들은 뭘 했기에…. 법사위원장은 이 일을 어떻
게 해결했으면 하오?"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지금부터라도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명
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법령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작업이 방대할 텐데 무슨 수로 짧은 기간에 그 많은 법률을 고치
고 제정할 수 있겠소."
"각하, 지금은 혁명상황입니다. 대한민국 통치의 근간이 되는 법
률체계를 제가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법령 번역작업과 병행하여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일본법령을 폐
기시키고 필요한 법령을 새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각 부처에 법무실
제도를 신설했다. 이석제는 장교시절 제대한 뒤 고시를 치려고 법률
공부를 해두었는데 그것이 이런 일대 개혁조치로 연결된 것이다.
(*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
(* 이동국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