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고뇌하는 독자라면 아리엘 도르프만
의 소설집 '우리집에 불났어'(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한기욱옮김, 창
작과 비평사)를 읽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쉽게도 도르프
만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작가다. 그런데 어찌 도르프만
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일까. 한국 독자들이 영미 문학을 세계 문학으
로 이해하는 편협함을 벗어나지 않는 한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은 언제
까지나 미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들은 결코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
아니다. 가령 아르헨티나 출신의 보르헤스는 어떤가? 오늘날의 포스
트모던 문학은 보르헤스의 존재를 제외하고서는 논의 자체가 성립되
지 않을 만큼 그의 위상은 각별하다.

그러면 도르프만은?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도르프만은 칠레의 억압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주목하며 시, 소설, 희
곡, 비평 등을 열정적으로 써온 다재다능한 작가, 혹은 대안적 서사
를 기획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도르프만은 저항
내지반체제 작가로 분류되지만 그의 작품은 우리쪽의 저항적, 반체제
적 작품들이 보여주는 상투성을 확실히 뛰어넘는다.

돌이켜 보면 80년대에 나온 우리의 수많은 저항적, 반체제적 작품
들은 그 치열한 주제 의식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인 상투성에 빠져버렸
다. 억압적 현실을 관찰하는 작가의 눈이 갱신되지 않았던 것이다.따
라서 소위 민중문학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에서 독창적인 상상력과 문
체, 수사를 발견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억압적 현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 현
실을 관찰하는 새로운 눈이 중요하다. 도르프만의 소설을 읽어볼 만
하다고 인정하는 이유는 조국 칠레의 억압적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독특한 소설세계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열 한 편의 작품들은 상투적인 사실주의의 범
주를 하나같이 뛰어넘는다. 예컨대, '독자'는 독재 사회를 비판하는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 방법은 포스트모던적이다. '독자'의
화자는 검열관인 돈 알폰쏘. 그 검열관이 하는 일이란 정권 비판의
'불온 서적'들을 가려내는 것. 그가 읽는 '변모'라는 책은 서기 8000
년 쯤의 가상적인 독재 정권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돈 알폰쏘는
이 책을 읽으며 자기 처지와 흡사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이
름은 호쎄 꼬르도바이다. 그러니까 돈 알폰쏘는 현실의 인물이며 호
쎄 꼬르도바는 허구의 인물인 셈이다.

이 소설의 탁월함은 현실과 허구의 긴장적 관계를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 즉 진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현실이 그려진다는 데에
있다.이처럼 도르프만은 사실의 재현을 중시하는 우리의 민중주의 작
가들과는 달리, 현실과 상상적 허구의 관계를 중시하며 '이야기하기'
의 새로운 문법을 만드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그 누구보다 이야기하기 방식을 새롭게 기획하고 사람간의
진정한 소통을 꿈꾼다. 이 명제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작가 도르프만
의 소설에서 한국 소설의 새 지향점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