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넘기던 아시아 아이들의 고사리 손이 이젠 구걸을 하고 있다.
초토화한 농촌은 더 이상 돌아갈 마음의 본향이 아니다. 기업의 자산
이라던 회사원은 부담스러운 짐일 뿐이다. 상황이 심각하다. 경제회
생을 떠맡을 아시아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 국민총생산(GNP), 외채,
주가, 환율 등 거창한 통계수치가 묘사하지 않는, 일본 홍콩 태국 인
도네시아 등 아시아 중산층의 비명과 눈물을 소개한다. (편집자).

야노 히데아키(54·가명)씨는 매일 오전 9시만 되면 도쿄의 번화가

신주쿠 직업안정소개소의 문을 두드린다. 작년말 직장을 잃은뒤 10개

월째 반복되는 일과다. 주말만 빼고 매일 마주치는 '직업소개소 동료'

들과 가벼운 목례를 나눈뒤 '업무'를 시작한다. 바로 소개소에 비치된

구인카드 뒤지기 작업.

10개월 전 그는 중견 소프트웨어 회사 경리부장이었다. 웬만큼 살
았다. 자신을 전형적인 중류층이라고 생각했다. 전철로 50분쯤 걸리는
도쿄 교외엔 2층짜리 집이 있었다. 월급 60만엔은 넉넉진 않았다. 그
러나 두 아이 키우며 생활할 만했다. 지갑에 보통 2만엔이 들어 있었
고, 퇴근후 술 한잔이나 파친코를 즐길 수 있었다. 가끔은 회사 접대
비로 골프도 쳤다.

그의 인생에 금이 간 것은 회사가 인원정리에 나서면서부터. 회사
의 압력이 치사해 사표는 냈다. 그러나 새 일자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 3인 차남은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부인은 "이젠 제가 책임지겠다"
며 수퍼마켓에서 눈물겨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남은 것은 2년정도
버틸수 있는 퇴직금과 매달 8만엔씩 10년을 더 갚아야 하는 주택융자
빚뿐이었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한 구인카드 뒤지기는 거의 끝나갔다. 그러나 일
자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는 것이라고는 장부정리 밖에 없는 50대
중반의 그는 기술은 없지만 나이가 많아 임금은 많이 줘야 한다. 회사
가 채용을 기피할 조건만 두루 갖추고 있다.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공
원으로 향하면서 그는 70년대가 생각났다. 일손부족이 심하던 그때 여
러 회사들은 "당신은 나라의 역군" "우리 회사는 사람을 재산으로 여
깁니다"라며 제발 자기회사로 와 달라고 애원했었다. 이제는 "회사가
어려운데 어떻게 하느냐"며 거치른 말투 뿐이다.

"사무직에서 갑자기 화장실 청소로 업무가 바뀌었다"(식품회사 근
무 40대 남성) "출퇴근이 불가능한 지방으로 발령받았다"(호텔 근무
50대여성)…. 일본노동변호사회가 설치한 '정리해고 비상전화'에 비친
기업의 중산층학대 실태다.

일본인에게 회사는 바로 가정이며, 그 가정에서 쫓겨난 '중산층'의
수는 도쿄에만 58만명. 실업률은 매달 발표때마다 사상 최고기록을 거
듭하고 있다.

도쿄 스미다 강변엔 홈리스(집없는 사람들)의 텐트가 2백여개 늘어
서 있다. 도쿄에만 3천7백명의 홈리스가 있고 곳곳에 텐트촌이 있지만
이곳은 전망이 좋아 일명 '테라스'(전망대)라고 불리는 '고급 텐트촌'
이다. 전에는 인생을 포기한 부랑자들이 모여살았다. 지금은 중산층
포기를 강요받은 새 '입주자'가 속속 찾아들고 있다.

빚을 갚지 못해 법원에 파산을 신청한 사람은 지난해 사상 최고(7
만2천여명)를 기록했다. 과거엔 10∼20대 젊은층이 신용카드를 겁없이
사용하다 파산하는 '과소비형 파산'이 많았다. 최근엔 임금이 줄어,아
니면 실직해 빚 갚을 능력을 잃은 중산층의 '불황형 파산'이 주류이다.

일본 사회가 무엇보다 우려하는 것은 중산층의 심리적 붕괴와 자신
감 상실이다. 인재파견회사 ㈜파소나 조사에 따르면 기업 관리직의 69%
가 "나도 언젠가는 인원정리 대상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60%는 "실
직하면 재취직할 자신이 없다"고 응답했다.

일본 중산층은 위로 올라갈 것인지, 밑으로 내려갈 것인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60년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대부
분 중산층은 밑쪽으로 '하향해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