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는 갔지만 수호이(SU) 전투기는 매일 러시아 상공으로
출격한다. 러시아 첨단과학의 상징인 수호이의 위용은 대단하
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최고의 수호이 조종사는 검은 머리의 최
올레그(54)씨. 출격횟수 6천6백여회에 5천여시간의 비행시간을 갖
고있는 러시아 최고의 탑건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겪은 강제이주의 설움을 딛고 창공에서 기개
를 맘껏 떨치고 있는 한인 영웅으로 탄생했다. 1937년 스탈린 강
제 이주책으로 삭막한 중앙아시아로 떠나온 비참한 가족사가 최씨
인생을 바꿔놨다. 유년시절 한여름밤. 텐산산맥을 흘러나온 물줄
기가 제방을 뚫고 논으로 유입되자 마을 한인 모두가 벼농사를 지
키기 위해 한밤중에 제방을 쌓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고 부모 손에 끌려 논으로 나왔던 최 올레그는 굉
음을 내며 하늘을 나는 비행기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에 조종사의
꿈을 심었다. 조종사는 당시 소련내 최고의 선망 직종이었다. 그
러나 한인 3세에 보잘것없는 집안 내력, 복수심과 증오심이 가득
찬 이주 생활에서 그가 가진 것이라곤 끈질긴 집념 하나뿐이었
다.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찾아간 곳은 우크라이나.

최씨는 지난 62년 우크라이나 소재 체르니코프스키 비행 군사
학교에 입학했다. 4년 뒤 임관과 더불어 꿈에 그리던 전투 조종사
가 됐다.이후 36년동안 공군 전투조종사로, 러시아가 개발한 신예
미그(MIG)기, 수호이(SU)기 시리즈를 두루 조종해왔다. 지금은 군
에서 예편, 모스크바에 있는 수호이 설계국에서 테스트 파일럿(Test
Pilot)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살아있는 러시아 전투기 역사의 산
증인이다.군사학교 졸업과 더불어 당시 최신 개발 모델인 미그21
을 처음으로 모는 전투 조종사가 됐다. 그리고 미그기 전 기종,수
호이 시리즈에 이어 지금은 꿈의 전투기로 불리는 SU37 등을 조종
하고 있다.

전투 경험도 풍부하다. 70∼71년 이스라엘-이집트 전쟁때 미그21
을 몰고첫 출격, 프랑스제 미라주 전투기를 격파하는 등 탁월한 능
력을 검증받았다. 78∼7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때는 수호이25에 미
사일을 장착, '적진지'를 폭격하는 등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소련
정부는 최씨의 능력을 인정, 74년 우주비행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우주 비행사의 무중력 훈련과 비행에 관심이 없었
다. 그는 "우주선은 우주비행사에게 비행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아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될 뿐"이라며 거부의 이유를 밝혔다. 그때
만약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주를 밟은 최초의 한인이 됐을것이다.

최씨에게는 창공에서 이루지 못한 하나의 꿈이 있다. 한국내 혈
육을 찾는 것이다. 지난 96년 최씨는 꿈에 그리던 고국을 방문했
다. SU30을 몰고 '서울에어쇼'에 참가했지만 일반인과 접촉이 쉽지
않아 그가 조국에 온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할아버지 이름은 최기학입니다. 강릉에서 살다 가족과 헤어져
연해주에 정착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족보를 강조하
셨던 할아버지께서 강조하신 핏줄을 찾고 싶습니다.".

아버지(최금연)에 이어 3년전 형(금철)마저 숨지자 장손으로 집
안의 내력을 자식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최씨는 할
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강릉에 있을 가족을 찾아보라는 유
언을 남겼지만 당시는 한국과의 왕래를 생각할 수도 없는 처지여서
안타까웠다고 했다. 최씨는 오는 10월 성남에서 개최되는 '제2회
서울 에어쇼' 출격 준비를 하고 있다. 분명히 국내에 있을 혈육과
의 상봉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모스크바에 살고있는 최씨는 부인 장아나씨와의 사이에 3남을
두고 있다. 큰아들 알베르트(29) 역시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공군
전투조종사로 재직하고 있다. 그 밑으로 아들 쌍둥이(25)를 두고
있다.

●약력
▲ 44년 타슈켄트 출생
▲ 66년 체르니코프스키 비행 군사학교 졸업
▲ 70∼71년 이스라엘 이집트 전쟁 참전
▲ 78∼79년 아프간 전쟁 참전
▲ 89년 파리 에어쇼 참가
▲ 90∼영국, 독일 등 에어쇼 참가
▲ 96년 옐친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 최고 무공훈장 받음
(공군조종사 사상 두번째)
▲ 현재 수호이(SU) 설계국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