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평론가들은 그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했다. 부상으로 2년 이상
출장을 못했다. 하지만 팬들의 관심이 사라져갈 무렵 어느 틈엔가 그
는 부활해 있었다. 다시 야구장에 나타난 노장 선수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에 팬들은 조용한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가네무라 요시아키(35·세이부 라이온스 타자). 한국명 김의명.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자신이 한국 국적임을 밝히는 단 한 명뿐인
현역선수. 그의 이름을 말할 때 재일한국인들은 17년 전의 그날을 떠
올리며 감격에 젖곤 한다.

81년 고시엔 고교야구선수권대회.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 대회의 스타는 단연 가네무라였다. 투수겸 4번타자였던 그는 결승
까지 6경기를 모두 완투하면서 모교의 우승을 이끌어냈다. 방어율은
0.98.타자로서도 5할4푼5리, 2연타석 홈런의 경이적인 성적을 냈다.

그는 80년 역사의 고시엔이 배출해낸 역대 최고의 스타였다.

하지만 재일한국인들을 정작 놀라게 한 것은 그 후였다. 그는 자
신이 한국인 3세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뿐 아니었다. 결승전에서
맞붙은 두 팀선수 18명중 가네무라를 포함해 무려 7명이 한국인이었
다. 81년 고시엔대회가 '한국인 잔치'였다는 얘기는 교포사회에서 지
금껏 신화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시엔의 영웅' 가네무라는 이듬해 드래프트 1위로 프로에 입문
했다. 긴테쓰 중심타자(3루수) 시절 그는 펀치력 있고 찬스에 강한
선수로 유명했다. 그의 플레이는 늘 활화산 같은 에너지로 넘쳐흘렀
다. 야구팬들은 호쾌하고 스케일 큰 야구로 일세를 풍미한 선수로 그
를 기억하고 있다.

교포사회가 그에게 느끼는 애정은 더욱 각별했다. 그의 당당함 때
문이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긴 일이 없다. 재일한국
인 선수만 모으면 천하무적 팀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일본 프
로야구계에서 활약하는 우수한 교포선수들이 많다. 하지만 인기추락
을 걱정하는 이들은 자신의 출신을 필사적으로 숨긴다.

그 유일한 예외가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 장훈이었다. 그리고
가네무라가 그 뒤를 이었다. 가네무라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장훈
이다.

장훈 같은 야구, 장훈 같은 인생을 살겠다고 목표를 정했다. 야구
선수로서 장훈만큼의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살아온 인생역정
은 장훈 못지않게 당당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와 장훈은 여러 모로 닮은 꼴이다. 누구에게 지는 것을 그도 죽
기보다 싫어했다. 아버지는 "차별에 지지마라. 무엇이든 1등이 돼라"
고 그를 가르쳤다. 게임에 지면 분해서 밤새 방망이를 휘둘렀다. 일
본인과 똑같이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
의 야구인생을 지탱해온 것은 오로지 근성과 정신력이었다.

작년까지 17년 동안 1천2백 경기에 출전해 2할5푼9리의 통산성적
을 기록했다. 홈런은 1백26개. 30살 되던해 갑자기 슬럼프가 찾아왔
다. 부상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고 타율은 2할 밑으로 내려갔다. 점
차 출장 횟수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주니치를 거쳐 작년 세이부로 이적하면서 그는 다시 부활
했다. 악착같은 근성으로 지난해 대부분 경기에 출전해 3할6리의 성
적을 냈다. 올해엔 찬스 때의 대타전문으로 변신, 3할7푼5리의 타율
을 기록중이다.

불사신 같은 부활극에 팬들은 '돌아온 고시엔의 영웅'이란 별칭을
붙여주었다.

인터뷰에 나온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전날 경기에서 그는 모
처럼 스타팅 멤버로 출전해 3타수 3안타의 맹타를 휘둘렀고 타점도
올렸다. 인터뷰를 끝내고 호텔 커피숍을 나오자 그를 알아본 10여명
의 팬이 주위를 둘러쌌다. 묵묵히 사인을 해주는 그의 뒷모습은 가네
무라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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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63년 효고현 출생
-74년 소년야구대회서 4경기 5홈런의 신기록 달성
-81년 고시엔 고교야구대회 최우수선수상(호도쿠 고교 3년)
-82∼94년 긴테쓰(3루수)
-82년 2군 올스타전서 사이클히트 기록
-95∼96년 주니치(내야수)
-82∼97년 통산출장 1천1백96시합, 타율 2할5푼9리, 홈런 1백26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