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장 변경의 어떤 아침 ##.
시장은 하는 수 없이 대회장에서 한참 떨어진 제1공업단지내에 있는
어떤업체의 회의실에서 투쟁위원회 간부들을 만났다. 모든 정황으로 미
루어 이미 다른 선택이 없어진 시장은 가능한 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터이니 난동부터 중지시켜줄 것을 당부했다. 위원회 간부들도 거기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이 합의내용을 가지고 난동현장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모든게 늦어 있었다. 서울시장과 투쟁위원회의 합의내용조차 전하기 어
려울 만큼 군중은 난폭했다. 그들은 이제 미래의 처우개선을 넘어 과거
의 분풀이 한풀이까지 요구하며 서울시장과 간부들 및 대단지 사업소
직원들을 찾는데만 혈안이었다. 열두시가 넘어 성남 소방서의 소방차
두 대가 동원되고 다시 광주경찰서 기동대 백여명이 지원을 나왔으나
성난군중을 막을 길이 없었다. 성난 군중은 이리저리 몰려 다니며 관공
서를 부수고 눈에 띄는 관용차는 모두 불태웠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민
간인 차량까지 빼앗아타고 서울로 가자고 외쳐댔다.
서울경찰서에서 파견된 기동대 수백명이 그들의 서울진출을 막기 위
해 달려오고 이어 광주경찰서에서도 수백명의 기동대가 실려왔다. 군중
들은 그래도 움츠러 들지 않고 그들과 돌팔매와 욕지거리로 맞서며 제
법 장기전의 태세까지 갖췄다. 그러다가 서울시가 모든 요구조건을 들
어 주겠다는 것이 명백해지고서야 흩어졌는데 그 최후의 순간까지 명훈
은 그 선두그룹에 섞여 있었다.
(나는 두 제국을 가진 이 특이한 세기의 변경이기에 성립되는 논리
에 오랫동안 주눅 들어왔다. 터무니 없는 원죄의식에 억눌려 무슨 일이
든 반공의 부적만 내밀면 소스라쳐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
다. 나는 이제 내 몫을 다 치렀다. 너희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더이상
바닥이 없는 곳까지 내 삶을 낮추었고 요구를 억눌렀다. 어떤 죄도 최
소한의 생존조차 요구할 수 없을 만큼 크지는 않다. 하물며 그 죄란 것
이 단지 피로 물려 받은 원죄임에랴.).
처음 군중의 선두를 내닫는 명훈을 지배하는 것은 그런 일종의 해방
감이었다. 그러다가 영희를 만나면서 그 해방감은 전투적인 의식으로
변해갔다.
명훈이 영희를 알아본 것은 성남출장소를 나와 새로운 공격목표를
찾고있을 때였다. 진작부터 무슨 환청처럼 누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
리를 들었는데 그때서야 영희를 알아본 것이었다. 비에 젖어 추레해보
이는 옷차림에다 화장이 지워져 얼룩진 얼굴은 영희가 확보한 천민자본
주의의 과일을 감추고 의심없는 도시빈민으로 위장시켰다. 그런 영희를
쓸어안고 명훈은 속으로 외쳤다.
(그래, 너도 드디어는 와야 할 곳에 왔구나. 이게 바로 이 사회가
일찍부터 우리에게 편입되기를 요구해온 계급이었다. 좋다. 나는 기꺼
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하겠다. 이제부터는 가차없이
싸우고 요구하겠다. 우리를 여기로 내몬 자들에게 우리도 결국은 자신
의 일부임을 상기시켜주겠다. 여기 이 단지를 허옇게 덮고 있는 내 불
행한 동료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