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하야'대세로… 군도 국민편 ##.

21일 오후 홍진기 내무, 김정렬 국방장관이 서대문 이기붕의 집에
들어서니 박마리아와 자유당 강경파 인사들이 그를 둘러싸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김정렬 회고록). 홍, 김 두 장관이 주위를
물리치게 한 뒤 이기붕에게 부통령 당선자직에서 물러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이
기붕의 안색이 변하더니 옆으로 스르르 쓰러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
이 "괜찮습니까"하니 이기붕은 "난 괜찮아, 말을 계속 하게"라고 했
다. 두장관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는 것
이 좋겠다"고 하니 이기붕은 의외로 선선히 응했다.

"내가 뭐 하고 싶어서 하나. 몸도 나쁘고 재간도 없네. 자네들이
이야기안 해도 그만둘 생각이었네."
"죄송하지만 공식발표를 해주시겠습니까.".

"그럼. 그래야지."
"그러면 언제쯤 경무대에 가시겠습니까."
"좀 있다가 가겠네.".

두 장관은 중앙청 국무회의실로 돌아가 기다리는 장관들에게 보고
했다. "사퇴성명을 감동적으로 써야 할 텐데"라는 말도 나왔다.

"명문장가인 한갑수씨가 비서로 있으니 잘 처리하겠지요.".

김정렬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경무대 박찬일 비서관이 전화를
걸어 "빨리 올라와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경무대로 가보니 응접실에
서 이기붕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아이구, 내가 말씀 드려도 영 고집불통이시네. 허락을 안해주시
는구먼. 자네가 가서 말씀드려보게.".

김 장관은 집무실로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퇴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이기붕 의장도 사퇴에 동의했다"고 알려주었다. 이승만은
"그래, 그렇게 하려면 해!"라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김 장관은 바
깥으로 나와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이기붕에게 이 말을 전했다. 김정
렬은 이기붕이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뒤 서대문으로 갔다. 한
시간쯤 기다리는데 이기붕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고 살았어! 아이고 살았어! 내가 그런 재목이 못 되지 않나.
내가 아주 무거운 책임을 면하게 되었네. 자네 덕분이네.".

다음날(4월23일) 점심 무렵 신문 호외가 국무위원실로 배달되었
다.

김정렬 장관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신문을 보고 입을 다물 수
가 없었다고 한다. '장면, 부통령직에서 사퇴'란 제목의 머리기사
아래 '이기붕, 부통령 당선 사퇴 고려'라는 작은 제목의 기사가 실
려 있었다.

'본인은 보수세력의 합동을 통해서 내각책임제로의 정치제도 개
혁을 고려한다. 부통령 당선 사퇴도 고려한다'는 이기붕의 애매한
성명은 이미 돌아버린 민심을 우롱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신문
들도 사설을 통해서 앞다투어 이기붕을 치고 있었다. 국무위원들은
"아니, 이게 무슨 꼴이오?"하고 김정렬 장관을 다그쳤다. 김 장관이
알아보니 이날 아침 한갑수 비서관이 초안하여 가져간 사퇴성명문에
대하여 자유당 강경파 인사들이 반발, '사퇴고려'란 표현으로 바꾸
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24일) 역효과에 놀란 이기붕은 '사퇴고려
란 표현은 잘못 전해진 것이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승만 대통령도 '전국무위원의 사표를 수리하고 자유당 총재
직에서 사퇴한 뒤 초당적으로 인사를 개편한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뒤였다. 25일 국회는 사태가 안정되었다는 이유로 '비
상계엄령을 26일 오전 5시를 기해서 경비계엄령으로 완화한다'는 결
의를 했다.

25일 오후 교수들이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
를 들고 서울대학교에서 국회의사당까지 시위를 벌였다. 교수들은
결의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이날 야당인 민주당
도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자'에서 '이승만
하야'로 바뀐 것인데 그때까지 시위학생들 가운데서도 이승만 하야
를 주장한 이들은 소수였다. 이제 상황은 거대한 자체 관성에 이끌
려 굴러가고 있었다. 25일 오후 세종로, 국회의사당, 중앙청 일대로
쏟아져 나온 수십만 군중은 통행금지 시간을 무시했다. 당시 대한일
보 편집부국장 오소백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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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의 시위대는 이기붕의 집으로 몰려갔다. "공산당도 싫다. 이
기붕도 싫다"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경비경찰관들이 이 시위대에 발
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기붕 가족은 피신한 뒤였다. 시위대는
정치깡패 임화수와 이정재의 집으로 쳐들어가 박살을 내고는 가재도
구와 집기를 끄집어내어 불질렀다.

4월25일 포천 6군단장 강영훈 중장은 숙소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밤9시쯤 당번병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더니 "서울에서 손님이 오셨
습니다"고 했다. 잠옷바람으로 나가니 응접실엔 이기붕의 차남 강욱
이 서 있었다.

"부모님을 또 모시고 왔습니다. 서울에서 또 소요가 났습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신가.".

"밖에 세워 둔 차 안에 계십니다."
"빨리 모시고 오너라.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강 장군이 군복으로 갈아 입고 나오니 응접실에 이기붕이 박마리
아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었다.

"이거, 내가 또 왔네."
"잘 오셨습니다.".

강 장군은 이기붕 일행을 소파에 앉게 했다. 1952년에 강영훈 장
군은 국방부 경리국장 겸 관리국장으로서 이기붕 국방장관을 모신
적이 있었다.

군단 일직 사령의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데모 학생들이 20여대의 자동차를 뺏어 타고 미아리 고개
를 넘어 북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 (*이동욱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