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아버님이 쓰신 이 작품을 다시 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재미작가 김유미(57)씨는 지난 12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국립중앙극장
을 찾아 무대를 지켜본다. 그때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다.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수만리를 한달음에 날아온 이유는 하나. 77년
작고한 부친(김영수)의 대표작 '혈맥'(연출 임영웅·12∼21일)이 초연
50년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극단이 정부수립 50
년을 맞아 '한국현대사 재발견' 시리즈 첫회로 택한 작품이다.

"48년 여덟살 때인가, 서울 중앙극장에서 '혈맥'을 봤지요. 어떤 아
저씨가 방공호 앞에서 깡통 두들기던 대목이 어렴풋이 생각납니다."'혈
맥'은 47년 초여름 성북동 산비탈에서 집도 없이 방공호에 사는 세 가
족을 다뤘다.

깡통을 펴 그릇을 만들고 미제 담배가 보물취급 받던 당시 생활상
을 그림 그리듯 생생하게 재현한다. 48년 문교부주최 제1회 전국 연극
경연대회에서 작품상 연출상 남녀주연상을 휩쓸었다.

와세다대 영문학부를 중퇴한 김영수씨는 34년 '광월'(조선일보)과
'동맥'(동아일보)으로 신춘문예를 통과한 극작가. 소외된 계층 궁핍상
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50년대 이후엔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생활비를 대느라 희곡을 중단하고 드라마를 쓰는 걸 늘 아쉬워하셨
지요.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킨 뒤 74년인가 '김영수'라고 도장
찍힌 원고지 1만장을 들고 미국에 건너오셨어요." 하지만 웬일인지 작
품은 쓰지못한 채 고국에 들어갔다가 얼마후 돌아가셨다 한다.

유미씨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원고지를 보며 이제 내가 글을 쓸 차
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피 말리는 직업이라며 한사코 말리던 아버
지도 딸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자 관심이 쏠렸던 모양이다. "줄거리가
어떻게 되느냐, 등장인물이 많을 필요없다, 앞에 쓴 부분만이라도 먼저
보내달라, 매일같이 편지를 보내오셨지요.".

첫 장편 '칭크'(동양인을 이르는 비칭)를 탈고하기 전 아버지는 세
상을 떠났다. MBC 창사특집 드라마로 방영됐던 장편소설 '억새바람'으
로 이름을 얻은 김씨는 수필집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라'와 시집 '정떼
기연습'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63년 도미한 그는 교사로 20여년 재직
하면서 교육전문가로도 명성을 쌓았다.

"아버지를 모델로 한 소설을 얼마전 탈고했습니다. '혈맥' 공연에
맞춰 출간했더라면 더 뜻깊을 텐데…." 제목은 '활화산'. 열정적인 부
친 생전 모습을 함축한다. 그는 "무대를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새롭게 솟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