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1군사참모장 ##.
박정희 소장의 7사단은 설악산 일대를 관할지역으로 하고 있었다. 대
청봉 능선에서 8연대가 예비진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예비진지란 제1선
이 붕괴되었을 때에 대비한 제2선의 참호와 교통호였다.
박정희는 어느날
아침회의를 하다가 8연대장이 이 진지공사 현장에 한 번도 올라가보지 않
았다고하자 화를 내더니 같이 가 보자고 일어섰다. 박정희는 '스페어 깡'
이라 불리던 20리터 들이 야전 철통 20개에다가 막걸리를 담아 들고 오게
했다. 사단장과 참모들은 설악산 등산을 시작했다. 정상 바로 아래서 반
달곰을 발견하여 사살했다. 박정희는 곰고기를 삶아먹도록 했는데 비릿한
맛이었다고 한다.
해발 1천m를 훨씬 넘는 고지에서 참호공사를 하던 병사들은 사단장이
갖고 온 막걸리와 곰고기를 포식했다. 진지 공사를 지휘하던 대대장이 박
정희에게 보고했다.
"제가 전쟁 때 이곳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고 후
퇴를 하는데 부하 사병 한 사람이 호 안에서 죽어 있는 것을 수습하지 못
했습니다. 비옷으로 시신을 덮어놓고 돌로 호를 채운 뒤 표시를 해두고
물러났는데 이번에 이 공사를 하러 와서 유골을 찾았습니다.".
"그것 잘 됐다. 좀 기다려 봐.".
박정희는 마치 지관처럼 사방을 둘러보더니 "이곳에 매장하자"고 했
다. 즉석에서 묘를 파고 유골을 옮겨묻었다. 그리고 원목을 깎아 비목을
세웠다. 그리고는 막걸리를 붓고 위령제를 지냈다. 며칠 뒤 8연대 방첩대
파견대장 이동걸 소령이 사단장 숙소에 들렀더니 박정희는 마분지 위에
무엇을 놓고 태우고 있었다. 이 소령이 "그게 뭡니까"라고 묻자 박정희는
씩 웃으면서 "웅담을 말리는 중이야"라고 했다. 이동걸 소령은 "사단장이
별것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방첩대 장교의 눈에비친 박정희는 약점
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휘관들이 부패하면 방첩대 장교들의 눈치를 보면
서 비굴한 태도를 취하는데 박정희는 그런 게 없으니까 오히려 방첩대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청해야 했다. 박정희는 폭음을 하고 있었다. 술자리
에서 업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술자리에선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 같았
다. 어느 날 박정희는 이동걸에게 "어이, 자네가 남자해라. 내가 여자할
게"라고 하더니 작부의 치마를 벗겨 자신이 입고는 이동걸을 데리고 마루
로 나와선 마루판이 꺼질 정도로 뛰고 춤추고 했다. 방첩대가 관리하고
있던 박정희의 신상기록표엔 좌익전력이 적혀 있긴 했지만 방첩대에선 그
런 면에선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동걸은 "박 사단장은 파렴
치범은 가차없이 군법회의에 넘겼지만 업무상 잘못을 저지른 부하들은 과
감하게 용서했다. 그 구분이 철저했다"고 기억한다.
1958년 6월17일 박정희 소장은 1군 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원주
로 부임했다. 그 전해 1군 사령관으로 승진한 송요찬 중장이 그를 데리고
간 것이다. 송요찬은 대외적인 활동에 바빠 야전군의 안살림을 박정희에
게 맡기다시피했다. 치밀한 박정희와 호탕한 송요찬은 서로 잘 맞았다.박
정희로서는 야전군의 사단장들 및 참모들과 업무적으로 친해져 자연스럽
게 인맥을 구축하는 기회가 되었다. 박정희 참모장 아래를 거쳐간 참모진
은 인사 박경원(육군소장 예편), 작전 최택원(총무처 차관 역임), 작전
채명신(주월한국군사령관 역임), 정보 김용순(중앙정보부장 역임) 등이었
다. 모두 5·16거사 때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중용되었다.
송요찬-박정희 콤비는 이 때 국군역사상 가장 큰 개혁 중의 하나를
했다.
즉 후생사업을 중단시킨 것이다. 군대 차량을 민간인에게 대여해주어
돈을 받고 이 돈으로 월급이 적은 장교들을 도와준다는 취지로 한국전 때
부터 묵인되었던 후생사업을 1군에서부터 없애자 곧 전군으로 파급되었다.
이 후생사업으로 많은 장교들은 부패, 치부하고 정치권과 언론한테는 약
점이 되었다. 이런 구조적 부패요인을 뜯어고치자니 반발이 없을 수 없었
다. 작전참모 채명신 준장은 이렇게 적었다(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송요찬은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앞으로 30일 이내에 민간인들에게 대여해준 모든 차량을 원대복귀시
킨 다음 정비를 마치고 지휘검열을 받을 준비를 하라!".
송요찬은 이어서 1군 전 부대에 대한 모포실사를 했다. 그때까지 장
부상으로는 사병 1인당 여섯 장이 지급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실사를 해
보니 1인당 한 장꼴도 되지 않았다. 수십만 장의 모포가 없어진 셈인데
그래놓고도 미군에 대해서 추가적인 모포지급을 요청해야 했다. 송요찬은
이어서 부대의 난방, 취사용 연료를 장작에서 석탄으로 바꾸어나갔다. 군
부대가 있는 곳에 숲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해서 '송충이'란 별명까지 얻
게 했고 벌목 때문에 지휘관들이 기자들의 밥이 되도록 했던 시대를 마감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렵 황지를 중심지로 한 석탄증산 붐 덕분이었다.
휴전 후 우리 군대는 막사건설, 진지 구축, 전술도로 공사에 열중했
다. 외부에서 자재를 지원받지 않고 거의 자력으로 이런 건설공사를 하자
니 나무가 남아나질 않았다. 금화 남쪽 사창리에 주둔하고 있던 6사단에
근무했던 이건영(12·12사건 때 3군 사령관) 당시 중령은 이렇게 썼다(회
고록 '패자의 승리').
역경에
처했을 때 위대한 생존력을 발휘하는 한국인들의 '무에서 유를 만드는 능
력'은 1950년대의 군대에서부터 단련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