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7사단장 ##.
박정희 준장이 진해 육군대학 학생으로 있을 때인 1957년1월 처제 육
예수는 고려대학교 사무원으로 일하던 조태호와 약혼했다. 박정희의 장
모 이경령은 신랑집에서 보내온 혼서함을, 자신의 팔자가 사납다면서 사
위에게 열도록 했다.
그해 3월20일 박정희는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한 진
해에서 육군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 열흘 뒤 6군단부군단장으로 발령을
받아 경기도 포천의 군단사령부로 부임했다.
당번병 박환영하사는 "관사를 배정받았는데 전기가 안들어와 석유 남
포불을 밝히고 살았다. 군단장 관사에만 전기가 들어왔다"고 기억한다.
6군단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백선엽대장의 동생 백인엽(전 선인학원
설립자)중장이었다. 외유내강의 형(형과는 판이한 성격의 소유자인 백인
엽에게는 용장이란 단어와 함께 '즉결처분권의 남용' '이승만의 총애'
'부패 장성'이란 단어도 따라다녔다. 백인엽의 부하로 근무했던 장교들
을 만나 보았더니 "그로부터 당한 모욕감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나
도 모르게 권총으로 손이 갔다"고 고백한 사람, "그가 나를 즉결 처분하
려고 하면 나도 같이 쏘고 죽을 결심을 하고 권총에 손을 대고 있었더니
그냥 갔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이런 성격의 백인엽 군단장 아래서
엘리트 의식과 자존심이 강한 박정희 준장은 모욕을 견뎌야 했다. 박환
영의 증언--.
"부대에 비상이 걸리면 박정희 장군도 철모에 완전군장을 하고 대열
의 선두에 섰습니다. 백인엽 군단장은 지휘봉으로 박장군의 철모를 탁탁
치면서 무슨 훈계 같은 걸 하곤 했습니다. 박 장군은 그런 대우를 받고
도 꾹꾹 참고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과가 끝나면 과음하
여 제가 업고 숙소로 돌아오는 일들이 잦았습니다.".
이 무렵 6군단은 미군이 개발한 5각 편제(1개 사단을 5개 연대, 1개
연대를 5개 대대로 나누고 부사단장이 2개 연대를 지휘)를 시험하는 훈
련을 예하 사단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박정희 부군단장은 이 훈련의 사
단통제관이었다. 이 훈련중에 박정희는 당시 7사단의 작전장교 손영길중
위를 만난다. 정규육사1기(통산11기)출신으로 전두환, 노태우와 동기인
손중위는 울산농고를 졸업했는데 교장이 박정희가 대구사범에 다닐 때
스승이던 박관수였다. 박교장을 통해서 박정희 장군의 이름을 알고 있었
던 손중위가 인사를 올렸다. 박정희는 그 뒤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손영
길을 지도해주었다.
"사병들은 전시에는 장교의 명령 하나로 목숨을 바치게 된다. 그렇게
만들려면 평시에 잘해주어야 한다" "너희들은 선배들의 좋은 점만 본받
고 나쁜 점은 쳐다보지도 말아. 앞으로는 너희들이 우리 군을 이끌어야
한다.".
손중위의 눈에 비친 선배 장교들 가운데는 부하들을 종처럼 부리고
군수물자를 빼돌려 자기 집을 짓는 따위의 행동을 거침없이 하는 이들이
많았다. 박정희는 그런 대세를 홀로 거스르고 있는 고독한 모습이었다.
군 장성들의 무능과 부패에 분노하고 있었던 박정희도 4년제 육사의
첫 졸업생인 11기 장교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이 기대는 5·16 뒤 손
영길-전두환 그룹에 대한 총애와 하나회의 결성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
든다.
백인엽 군단장으로부터의 모욕을 참고 있던 박정희는 결국 군단장을
들이 받게 되고 두 사람은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기 어렵게 되었다. 백선
엽참모총장과 참모차장 장도영중장이 힘을 써 박정희는 1957년9월3일 제
7사단장으로 전보되어 강원도 인제로 갔다. 떠날 때 박정희는 마당에서
기르던 수십 마리의 닭들을 장교 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군인 가족들
은 길 양쪽으로 도열하여 박정희와의 이별을 아쉬워 했다고 한다. 백인
엽은 5·16 직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을 받고 실
형을 선고받았다. 그 혐의 중엔 박정희가 부군단장으로 재직중일 때 있
었던 군납업체로부터의 수뢰와 기름처분에 의한 축재사실이 포함되어 있
었다.
박정희가 사단장 취임식을 할 때 사열을 지휘한 사람이 손영길 중위
였다.
그 뒤로 박정희는 손중위를 수시로 숙소나 회식장으로 불렀다. 사단
장의 총애 덕분에 손영길은 대령급 장교들 사이에 끼여 술을 마시곤 했
다. 박정희는 "이것도 공부야, 잘 배워 둬"라고 했다. 박정희는 상급부
대에서 시찰을 오면 사단 훈련시범을 손영길에게 맡기다시피했다. 박정
희는 또 월동용 김장을 할 때 손영길을 감독장교로 지명하여 떼먹는 사
람이 없도록 했다. 손영길의 기억에 따르면 그때 김장용 식료품을 납품
한 사람은 박정희의 매형이었다. 손중위가 규정량대로 고춧가루, 마늘,
생강을 넣도록 하는 바람에 그 매형은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박정희 신임 7사단장은 5사단 때의 참모 차규헌중령을 인사참모로,
윤필용중령을 군수참모로 데리고 왔다. 박정희가 자기 사람을 데리고 다
닌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그가 의식적으로 인맥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
다. 박준장이 7사단장으로 부임한 직후 평상시의 군대사고로는 가장 큰
보급창고 화재사건이 났다. 월동용보급품이 창고에들어온 날 밤11시쯤
불이 났다. 인부들이 일하다가 담배꽁초를 버린 것이 화인이었다. 1개
연대분의 피복이 몽땅 타버렸다. 박정희는 문책을 각오했다. 그런데 당
시 1군사령관 송요찬중장이 박정희에게전화를 걸어왔다.
"그 병참부장 혼 좀 내시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불탄 피복은 다
바꾸어줄테니 피해량을 조사해서 보고하시오.".
박정희는 그 전에 잃어버린 피복까지 피해품으로 보고하여 새로이 보
급을 받았다. 박정희는 그때 우리 군의 고질인 구조적 부패를 개혁하려
고 했다. 양곡관리 상황을 감사하여 4백 가마의 결손을 발견했다. 박정
희는 양곡관리의 책임자를 군법회의에 넘겨 엄벌하도록 지시했다. 재판
장에게도 사단장이 특별히 당부했다.
"쌀 도둑질 하는 놈들을 군법회의에 넘겨도 결국엔 다 빠져나가버리
고 옥살이 하는 걸 보지 못했어. 이번엔 내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어떻게 되는지 확인할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