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영수 정선으로… 박과 함계 후퇴 ##.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전의 주역은 미중양군으로 바뀌었고 국군과
인민군은 조역이 되었다. 정치와 외교는 전쟁의 연장이므로 군사적 조
역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주도권을 쥘 수는 없었다.
1950년12월26일 트루먼(대통령), 애치슨(국무장관), 마셜(국방장관),
브렛들리(합참의장), 스나이더(재무장관)는 한국사태를 협의한 뒤 3일
뒤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황이 절망적이 된다면 어떤 조치를 권고하고
싶은지 보고해달라고 통보했다. 12월30일 맥아더는 답신했다.
〈 1) 중국대륙의 해안선 봉쇄 2)해군과 공군을 동원한 포격과 폭격으
로 중국의 군수산업시설 파괴 3)대만의 지원군을 받아서 한반도의 방어
선강화 4)대만의 장개석군대에 대한 작전제한을 철폐하여 중공본토에
대한 양동작전 성격의 공격을 가능케 할 것. 이렇게 하면 중공의 전쟁
수행 능력은 약화될 것임. 한국에서의 승리를 보장하고 아시아의 다른
지역이 공산화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산 교
두보로의 점진적인 후퇴를 통해서 한국에서 철수하는 수밖에 없음〉.
트루먼은 참모들과 이 제안을 검토한 뒤 1월9일 합참을 통해 맥아더
사령관에게 '확전은 안된다.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도록 애써 보고 불가
능하다고 판단되면 일본으로 철군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냈다. 1월4일
서울이 중공군에게 넘어간 5일 뒤 미국은 드디어 한국 포기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합참이 자신의 건의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자 맥아더
는 다시 전문을 보낸다. '한국작전을 책임진 극동사령부에 대한 비정상
적인 제약 때문에 현재의 전선을 방어할 수 없다'.
트루먼과 참모들은 맥아더가 자신의 예상되는 패배에 대비하여 그 책
임을 워싱턴에게 전가하려는 함정을 놓고 있다고 해석했다. 트루먼은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급파했다. 콜린스는 세 가지
문서를 전달했다.
합참의 작전명령: '한반도에서 계속 싸워라'는 요지였다. 합참의 검
토문서: '일본으로 철수할 경우 취해야 할 16단계 조치'. 트루먼 대통
령의친서: '미국의 군사력 건설이 완료되기 전에 확전은 삼가해야 한다'
는 요지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만약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면 한반
도의 서남해에 있는 작은 섬들을 근거지로 하여 계속 항전할 각오라고
밝혔다. 콜린스 총장은 한국으로 날아가 릿지웨이 8군사령관과 함께 전
선을 시찰했다. 여기서 콜린스는 맥아더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된
다. 맥아더는 당장이라도 한국방어선이 붕괴될 것처럼 워싱턴에 겁을
주면서 중공을 때려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는데 현장에 와보니
의외로 미군의 사기는 충천하고 있었고 릿지웨이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
다. 유엔군을 일본으로 철수할 필요가 없다면, 그리하여 한국 전선을
38선부근까지 밀어올려 고착시킬 수 있다면 미국은 휴전협상을 통해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을 선택한 이 잘못된 전쟁'
에서 발을 뺄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로부터의 철수'라는 위협으로써
'중공본토로의 확전'을 유도해내려던 맥아더의 대도박은 기묘하게도 릿
지웨이 사령관의 유엔군이 중공군의 남진을 수원 아래에서 저지함으로
써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인민군 2군단의 공세에 밀려 9사단 사령부가 강원도 정선의 국민학
교로 이동한 것은 1951년2월2일. 박정희 참모장과 다른 참모들은 국민
학교부근의 텅빈 민가를 숙소로 썼다. 박정희는 기와집을 썼는데 아침
에 일어날 때마다 결혼식을 올린 지 닷새만에 헤어진 육영수가 그리웠
을 것이다. 사단의 군수지원을 책임지고 있던 박정희는 다행히 대구와
전선 사이를 오고가는 보급부대 편으로 편지를 주고 받고 있었다. 대구
삼덕동 집에서 육영수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살면서 독서와 편지쓰
기로 그리움을 달래고 있었다. 궤짝 위에 식탁보를 둘러 만든 책상에서
육영수는 거의 매일 남편 앞으로 편지를 썼다. 일기와 편지 문화에 익
숙한 세대인 두사람은 연락병들을 통해서 뻔질나게 편지를 주고받았다.
병참참모 김재춘 중령은 참모장이 너무 쓸쓸하게 보였다. 어느날 대
구로 출장가는 송재천 중위에게 "아무래도 참모장 사모님을 한번 모시
고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종동생인 육영수에게 송재천이 운을 떼
자 그녀는 두말 않고 따라나섰다. 군용차가 민간인을 전투지역으로 수
송하는 것은 군기위반이다. 송재천은 육영수에게 파커를 입히고 방한모
를 쓰게 한 뒤 스리쿼터의 운전석에 앉혀 군인으로 위장시켰다. 트럭은
공비가 출몰하는 경북-충북 지역을 따라 올라가다가 죽령을 앞에 두고
는 공비가 있다는 헌병의 제지를 받고 다음날 아침까지 트럭에서 오돌
오돌 떨면서 기다렸다. 입김으로 유리창이 얼면 손바닥으로 닦아가면서
트럭은 제천-영월을 거쳐 출발한 지 24시간만에 정선에 도착했다.
송재천 중위가 참모장에게 보고하자 박정희는 "그 사람 뭐하러 왔
대?"라고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즐거움을 내색하지 않도록 교육받은
박정희로서는 그것이 최상의 환영사였을 것이다. 훗날 육영수는 청와대
에서 이런 회고담을 털어놓았다.
"그분이 계시던 민가의 침구는 형편이 없었어요. 그런데 밤에 보니까
깨끗한 흰 수건으로 이불깃이 대어져 있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정성스
럽게해 놓았나 싶었지만 혼인한 지 얼마 안되어 물어보기가 쑥스러웠지
요. 그래도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쑥스러운지
씩웃기만 했습니다. 그 태도가 아무래도 본인이 그랬다고 말하는 것 같
았습니다.".
박정희는 그 10년 뒤 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을 때도 광주로 출장을
가서는 숙소의 세면장에서 밤에 몰래 자신의 양말을 빨다가 경호장교
이상훈(국방부장관 역임) 대위에게 발각당한 적도 있다. 항상 주변을
단정하게 만들어 놓아야 마음이 편했던 박정희는 자질구레한 신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못했다.
공산군은 2월16일부터 중동부 전선에서 총공세를 폈다. 인민군 2,
3군단이 9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9사단은 정선의 사령부를 포기하
고 후퇴의 길에 올랐다. 박정희 참모장은 육영수를 지프의 뒷자리에 태
우고 후퇴행렬에 끼였다. 창밖으로는 장병들이 눈비에 젖은 채 걷고 있
었고 박정희는 앞자리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
다. 육영수는 후퇴하는 길로 대구로 돌아왔다. 1주간의 진중체험이었
다. 당시 작전참모 손희선 중령은 육영수가 진중에 와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놀랐습니다. 전투중인 사단
참모가 아내를 불러다가 며칠이지만 함께 생활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할 수 없는 군기문란이었습니다. 박정희 참모장은 대구를 오고가
는 보급차량대를 관리하고 있었으니 그런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
을 것입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
(*이동욱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