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2장 날은 다하고 ⑭ ##.

"그럼 지난 1년 그렇게 열 올리며 몰려다닌 게 그저 한번 해본 거였
어? 마르크스가 어떻고, 레닌이 어떻고, 하던 거 네 말마따나 폼이었냐
구?".

한형의 그같은 물음에도 광석은 느긋하기만 했다.

"형, 그러고 보니 뜻밖으로 순진한 데가 있었네. 재작년에 경찰서에
끌려갔다 와서 홧김에 한 소리 죄다 믿은 모양이지? 솔직히 내가 박정
희 정권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코뮤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건아냐.".

"그럼 인공기 걸어놓고 김일성 만세 불렀다는 건 뭐야?"
"그건 그러면 이 정권이 싫어할 거라는 것 때문이었을거야. 그가 독
자노선을 걷는다는 게 멋있어 보였어. 아메리카가 제국이라면 소비에트
도 제국이야. 나는 제국의 논리에는 관심이 없어.".

"거 참 이상한 사상가도 있네. 달동네 하꼬방에 모여 1년 가까이나
열올린 게 겨우 그런 유치한 감정놀음이었단 말야?"
김형은 그러다가 갑자기 흥이 빠진 사람처럼 화제를 인철에게로 돌
렸다.

"그건 그렇고--, 이형은 또 웬일이슈? 작년 일은 저 얼치기 노가네
패거리들 파편맞은 거라며? 그런데 왜 갑자기 학교는 때려치우구?".

원래 인철은 한형을 만나면 진지하게 속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작
정이었다. 그러나 광석의 태도에서 받은 자극일까, 어느 새 그런 마음
이 사라지고 없었다.

"국어선생 노릇은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문학합네 하며 밑도끝도없이 빈둥거릴 팔자도 못되고…. 다시 나가 어
슬렁거리다가 어디 적당한 곳에 퍼질러 앉아 마음편하게 살려구요.".

"이거 오늘 내가 낮도깨비들한테 홀렸나? 둘다 뭔가 심상찮은 일을
저질렀는데 대는 이유들은 하나같이 엉뚱하니. 하기야 지금 우리가 무
슨 짓을 한들 이해받겠어? 그리고 무슨 짓을 한들 이해해주지 않겠어?
알아서들 하슈.".

한형도 마침내 캐묻기를 단념하고 정작 할일은 이거라는 듯 술잔만
벌컥벌컥 비워댔다. 하지만 끝내 그렇게 덤덤하게만 이어질 수 있는 자
리는 아니었다. 세 번째 특주 뚝배기가 비워질 때까지도 시덥잖은 얘기
로 킬킬거리던 노광석이 곧 혀굳은 소리로 한형에게 물었다.

"실은 나 월남에나 다녀오려구 일부러 해병대에 지원했는데--.형 허
풍빼고 말해 봐. 정말 전투병 선발부대로 갔다온 거 맞아? 다낭 들어갈
때 여자머리베어 허리에 하나씩 차고 들어간 거냐구? 그리구--, 거기
어땠어? 꽁까이들 정말 그리 예뻤어?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돈두 벌 수
있구?".

그러자 조금 전까지도 몽롱해져 가던 한형의 얼굴에서 술기운이 싹
걷혔다. 한참이나 광석을 관찰하던 눈길이더니 차갑게 말했다.

"왜 월남을 가려고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겠는데….""말했잖아? 덕
분에 외국구경도 좀하고…, 꽁까이도 안아보고, 돈도 벌 수있으면 벌
고….".

광석이 과장된 말투로 한형의 말을 받았다.